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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진 Sep 30. 2018

가난이라는 이름의 저주

물질적 결핍은 정신적 결핍을 야기한다


 가난에는 이자가 붙는다고들 한다. 지독하리만치 맞는 말이다. 당장은 대수롭지 않은 병도, 돈 십만 원 하는 치료비조차 부담되어 그냥 방치하면 훗날 눈덩이처럼 불어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라고 했던가? 누구라도 호미로 막을 수 있을 때 막으려 했지 않았겠느냐마는, 당장 생존의 문제에 매달리다 보면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경우가 많다.

 또한 환경이 여의치 않아 충분히 질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면, 훗날 낮은 학벌과 그에 따른 연쇄적인 페널티들을 떠안게 될 확률이 매우 높기 마련이다. 제 아무리 개천의 용이 될 가능성과 재능을 품고 있었다고 한들, 그것이 개화할 기회나 환경이 부재했다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에 어떻게 발이라도 걸쳐 보는 것도, 최소한 어느 정도의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어야 가능하다. 이는 이미 사회적, 통계적으로 충분히 검증된 사실이기도 하다(일례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및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연구 결과를 종합해보면 한국 사회의 빈곤 탈출률은 약 6%에 불과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끔찍한 것은, 이렇게 쌓인 이자는 특정 시점을 지나치면 상환할 수조차 없게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처음엔 단순 물질적 결핍에서 시작되었던 문제이지만, 종국엔 정신적 결핍까지 초래하게 된다. 인간 존재 그 자체가 잠식되어버리는 것이다. 흔한 말처럼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불편함을 겪는' 정도라고 볼 차원의 문제는 아닌 셈이다. 인간을 오롯이 존재할 수 없게 하는 저주와 진배없는 것, 그것이 바로 가난이다.





< 사진 출처 : Wikipedia >

 '저장 강박(Hoarding disorder)'이라는 것이 있다. 좀처럼 물건들을 버리지 못하고, 집에 쌓아두려고만 하는 집착과 강박 증세를 일컫는 정신의학 용어다. 나의 어머니는 이 증세 조금 심하신 편이었다. 어디 TV 프로그램에 나올 정도로 아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었지만, 항상 집엔 쓸모없는 잡동사니들로 가득했다. 평소엔 유별나다 싶을 정도로 청결을 중시하는, 깔끔한 성격이셨다는 점이 아이러니함을 더했다.

 

 언젠가 어머니가 낡은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를 주워오셨을 때의 일이다. 시대착오(?)적인 건 둘째 치고, 작동이야 된다고는 하지만 집에 카세트테이프가 없으니 음악을 들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쓸모없겠다 싶어 버리려고 하니, 어머니는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양 버럭버럭 악을 쓰며 화를 내셨다. 이미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으셨음에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 이후로 한 번 제대로 써먹어 본 적이 없었지만, 끝내 버리지는 못했다. 어쨌든 그게 집에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또 하루는 몇 년을 옷장에 처박혀 있었는지도 모를, 이젠 입지도 못할 그런 후줄근한 옷을 버리지 않겠다며 고집을 피우는 모습에 짜증이 터져 나온 적이 있었다. 당장 입으실 옷이 없으면 또 모르겠는데, 더 이상 옷을 걸어 놓을 공간조차 없음에도 옷장이란 옷장엔 꾸역꾸역 구겨 넣고 있으니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그러다 피차 감정이 격해지자 어머니는 네가 평소에 옷을 잘 사줬으면 그랬겠냐는 식의 한탄을 하셨고, 당연히 이는 사실 여부가 어떻든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말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이사라도 가는 날은 그야말로 밑천이 다 드러나는 날이었다. 평소엔 서로 싫은 소리도 잘 하지 않 가족들이었다. 하지만 쓰레기나 다름없는 잡동사니들을 두고 버리네 마느네 하면서 고성이 오가다 못해 서로 분노에 치를 떨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아릴 정도로 측은함과 안타까움을 느껴야 했다.

 

 사실 아주 이해를 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누구나 물욕이라는 것이 있고, 어머니는 오랜 세월 가정 주부로 살아오시면서 이런저런 살림살이들을 가지고 싶으셨던 적이 많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욕구가 충족될 일이 별로 없었다 보니, 그것이 일종의 한이 된 것이셨을 테다. 결핍된 욕망이란 한 인간의 생에 얼마나 깊은 상흔을 남기는 것이던가!

 

 하지만 심정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부모님이 아닌가. 평소 여유가 있었다면 이런 마음의 병 같은 것을 얻으시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이것이 정말로 저주가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싶었다.





< 사진 출처 : Pixabay >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뷔페에서 김밥 같은 것을 먹 것을 매우 못마땅해하셨다. 평소 밥상에 올라올   보다는, 그럴싸 보이는 음식을 먹어야지 구태여 구색 갖추기용 음식 같은 것으로 배를 채우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내 입에 맛있는 걸 먹고 싶었을 뿐이었고, 어차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곳인데 굳이 '본전'에 대한 강박을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종종 외식을 하러 나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음식점을 가더라도, 어머니는  돈 얘기 하셨다. 맛의 여부는 둘째였고, 너무 비싸다거나 양이 적다는 점 항상 불만이셨다. 원래 밖에서 먹는 게 다 그렇지 않으냐고 말해도, 좀처럼 받아들이시 못하셨다. 한국 어머니들의 강한 생활력, 즉 '억척스러움'이라고 보기에 그 정도가 지나치셨. 그러다 보니 종종 근사한 곳에 가더라도, 김이 팍 새거나 기분이 상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결핍에 익숙해지신 나머지, 최소한 대가로 최대한의 이득을 얻어야 한다는 강박 짓누르고 있었던 것일까? 조금이라도 여유가 없는 상황 자체를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시는 듯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돌이켜보니, 나라고 해서 딱히 예외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터넷에서 돈만 원짜리 물건 하나를 주문하는 데에도 정말 나에게 필요한 물건인지를 몇 시간 동안 고민하기 일쑤였고, 결정을 내린 뒤에도 온갖 사이트들을 뒤지며 최저가를 찾아보느라 또 시간을 쓰곤 했다. 어떻게 하면 쿠폰 하나라도 더 쓸 수 있을까 매달리는 꼴을 보면서, 스스로 한심하기도 하고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신중하다거나 합리성을 중시하는 성격이라서 그렇다기보다는, 그만큼 소비라는 행위에  느끼고 있는 중압감이 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원래 그래 왔던 것' 아니라, 환경에 의해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라는 사실 참담하게 느껴졌다. 삶이라는 것은 분명 더없이 숭고하고 고귀한 것일진대, 돈이 좀 없다는 이유로 한 인간의 우주가 이렇게 보잘것없이 작아진다는 사실에 부아마저 치밀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므로, 거의 대부분의 가치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상대적으로 규정된다. 이전까지는 최소한 먹고 입고 자는 문제는 겪지 않고 살아왔었다 한들, 그 수준을 상회하는 것들을 당연히 누리고 사는 이들을 목도하게 되는 순간 분노와 슬픔, 질투에 빠져드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과거 몇몇 후진국들의 행복 지수가 내로라하는 선진국들보다도 훨씬 높다며, 물질과 행복은 상관관계가 없다는 '행복론' 설파던 때를 기억하는가? 사실 그것들의 실상은, 일종의 프로파간다에 가까웠다. 고의로 외면하려 했을 뿐, 실제로는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풍요가 대체로 비례했기 때문이다. 특히 개혁과 개방이 이루어져 외부 세계와의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해질수록, 소위 행복 지수는 경제적 수준과 가까워지는 경향성을 나타냈다. 그도 그럴 것이, 부실한 물질적 토대 위에서는 수준 높은 의식이 빚어질 수 있을 리가 없으니 당연한 결과다. 완전히 폐쇄 사회라면  모르겠지만, 작금의 세상에선 '물질이 부족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은 실증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그릇된 논리다.

 

< 사진 출처 : Pixabay >

 그런 점에서 보면, 흔히 오르내리곤 하는 '소확행'이라는 단어도 기만적인 말이라 볼 수 있다. '라이프 트렌드'같은 그럴듯한 단어로 수식되고 있지만, 이전에 먼저 그런 말이 유행하게 된 사회문화적 배경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의 취향이 소박해지고, 안빈낙도적인 인생관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하게 실현 가능한 행복이라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사소한 것이 아니고서는 좀처럼 행복을 보증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절절히 자각한 적이 있건 없건, 인간인 이상 누구나 짙은 욕망이 있고 이왕이면 작은 행복보다는 큰 행복을 원하기 마련이다. 행복하려고 사는 것이 아니던가? 단지 감히 넘볼 수도 없는 것을 언제까지고 좇으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당장 보이는 작은 것이라도 움켜쥐려고 하는 것에 가깝다. 좁은 쪽방에 몸을 구기며 살아도 가끔 치킨 한 마리 정도는 시켜 먹을 수 있고, 작은 인공지능 스피커도 하나 사서 가지고 놀 수 있는 시대다. 한데 그걸 두고서 '아, 욕심 없이 사소한 것만으로 만족하며 사는 것이 맞는 건가 보다' 생각하는 것은 난센스다.


 'N포 세대'라는 사회 용어가 적절한 부연이 되겠다. 이 말이 가리키는 대상은 결코 그 누구도 시작부터 지레 주저앉지 않았으며 스스로 손에서 놓은 적도 없지만, '포기'라는 자동사를 통해 마치 주체적으로 열망과 의지를 떨쳐냈다는 느낌을 준다. 실상은 외부적 요인으로 의해 포기당한 것임에도. 이미 이전에 무언가를 갈망한 적이 있어야만이 후에 그것을 단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정치적인 언어인가?

 

 요컨대 인간이란 합리화의 화신이다. '나는 그냥 이렇게 살래'가, 사실은 결핍과 좌절로 인해 무너져가는 마음에 대한 방어 기제요 현실 부정일지도 모른다. 불편하건 불편하지 않건, 물질이 부족하면 정신도 망가진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강인하고 굳건한 마음을 먹고 '나는 그렇지 않아'라고 하더라도, 언제까지고 그것을 스스로 증명해 나갈 수 있을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집착과 강박을 버리고, 달관이라도 한다면 또 모르겠다. 하지만 그 달관도 과연 '내가 한' 것일까? 아니면 '하게 된'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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