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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진 May 26. 2018

철학이 왜 필요해?

'인간다움'의 조건


 일제 강점기, 일제는 우리에게 철학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행하는 교육의 목적은 ‘황국 신민’을 만드는 것이었다. 당연히 의식 있는 인간을 양성하는 일을 할 리가 만무했다. 또한 일본의 교육 제도는 프로이센에 근간을 두고 있는데, 이본적으로 일 잘하고 말 잘 듣는 노동자를 육성하기 위한 근대적인 주입식 교육 모델이었다.


 그렇다면 해방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알다시피, 당시 영역을 불문하고 사회 전반에서 막강한 주도권과 영향력을 확보하게 된 세력은 다름 아닌 친일 - 민족반역자 세력이었다. 이미 한 번 동족을 배신한 바가 있는 그들에게 있어, 의식 있는 인간이란 훗날 자신들의 목을 죌 수 있을 위험분자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일제의 교육제도를 답습하는 '전략'을 택했다. 격동의 근현대 시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소위 ‘높은 사람’들이 원하는 인간상이 똑똑하거나 깨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사람이었던 것은 이런 사실에 기인한다. 머리는 있으나 가슴이 없고, 지식은 있을지라도 지혜는 있어서는 안 될, 그런 빈껍데기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 곧 교육의 목표였다. 오늘날 한국에서 철학과, 아니 그냥 인문·사회계라도 진학한다 치면 "그런 데 나와서 취업은 어떻게 할래?"라는 소리를 듣고, 이내 "문송합니다"라고 대답하게 되는 현실을 보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된 듯하다. 교양서적을 읽어보라는 말에 “그건 수능에 나오나요?”라는 되물음을 던진다는 학생들의 일화는 이제 흔한 이야기가 되었다. 취업률이 미진하다는 이유로 가차 없이 학과들이 통·폐합되괴상한 이름들이 붙여지는 대학교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국 사회는 착실히 인간다움이 부재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 듯하다.

 




 선과 악, 정의와 부정을 분별하는 혜안이 없는 인간은 결국 무가치한 존재가 될 뿐이다. 나는 누구이고, 그런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무엇이며, 그래서 결국 나는 왜 사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인간이 어떠한 비극을 가져오는지는 이미 숱하게 보아 왔다. 남들보다 질좋은 교육을 받고 착실히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온 소위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보라. 지식만 있고 지혜가 없는 인간은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공멸을 초래하는 괴물에 지나지 않는다. 위에서는 특별히 두드러지는 사례를 들고자 교육을 언급했지만, 사실 이 문제는 사회 전반에 걸쳐 있다.


 그래서 결국, 이때 필요한 것은 ‘철학’이다. 경계가 옅은 철학의 특성상 ‘생각’, ‘신념’, ‘실천’, ‘분별’, ‘지혜’ 등의 다양한 단어로도 표현될 수 있겠으나, 그 본질은 모두 같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핵심 요소라는 것이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주는 것, 그것이 철학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사실 철학을 '필요'라는 단어와 함께 언급하는 것이 그다지 적절하지는 않기도 하다. 철학의 '쓸모'를 논한다는 것은 어딘가 철학을 도구적으로 다룬다는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철학은 마치 존재의 대전제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논의 이전에 이미 인간 사유의 모든 순간에 자리하고 있는 바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하지만 그렇게 도구로 다룬다고 해도, 철학은 여전히 가치를 가질 수 있다. 철학이 사멸해가는 세상, 모든 것이 물질화된 사회에서는 모든 판단 기준에 있어 ‘효용성’이라는 것이 선행하기 마련이라, 다른 누군가에게 철학이라는 것을 역설하고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접근 방법도 요구될 법하기 때문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철학을 무슨 '문과 끝판왕' 들이나 다룰 수 있을, 그런 손 닿지 않는 현학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모든 학문의 근간’이라고 지칭하는 만큼, 괜한 거리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모든 제들에는, 분야를 막론하고 철학이 개입할 여지가 있으며 해답을 제시해줄 수도 있다.




 철학을 일종의 ‘지도’로 보아도 좋다. 지도는 실재하는 어떤 존재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 그림이다. 지상에 그려진 것들은 각자 실존하는 어떤 것에 대응하고 있고, 지도가 그 대응을 어떤 방식으로 이루고 있으며, 대상에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지, 또 그 대응된 대상을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따라 천차만별의 지도가 존재할 수 있다. 우리가 길을 찾을 때 쓰는 지도와, 인구 분포를 볼 때 쓰는 지도, 지형을 볼 때 쓰는 지도는 모두 그 형태가 제각기 다르다. 마찬가지로 철학도 인간의 ‘생각’이 만들어 낸 지도이며, 그 대상 역시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길을 찾는 데 있어 지도가 유용한 것은, 그 지도가 그 대상에 대한 모든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지도만 보아서는 어떤 길이 포장 상태가 좋고, 어디에 있는 길이 덜 막히고, 어느 길이 정확히 몇 차선인지는 알  어렵듯 지도는 완벽하지 않고, 완벽할 수도 없다. 사실상 정보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단지 어떤 한정된 범위의 목적 내에서, 충분히 합리적인 시스템을 구현하였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 어떤 지도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완전히 표현하 못한다. 완전히 표현한다면 그것은 복제이지 지도가 아니다. 그런데 사실 복제는 지도만큼 유용하지도 못하다. 지도는 대상에 대한 정보를 추출해내어 잘 정리한 것인데, 대상 그 자체를 완전히 보여줘 버린다면 정보를 알아서 추출해내라는 것이니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우리가 모르는 길이라도 그럭저럭 잘 찾아갈 수 있는 것은 어떤 정보들이 담겨 있는 지도 덕분이듯, 인간의 삶 속에서 철학 역시 일종의 지도로써 그 소명을 다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철학자 셸리 케이건을 인용해보자. 그는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제시했는데, 첫째는 철학을 통해 서로 다른 주장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삶에서 어떤 문제에 대해 잦은 논쟁을 한다. 때때로 일상생활에서는 그다지 영향이 없을 추상적인 문제까지 논쟁하고 고민하는 이유는, 더 나은 사고력을 갖추고자 하기 때문이다. 항상 질문을 던지며, 현상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다각도로 접근하려 하며, 숨겨진 그 어떤 것을 찾아내려는 자세를 갖게 하는 데에 있어 철학이 아주 유용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적절한 이유일 뿐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라고 하는데, 진짜 이유는 바로 철학이 인간의 삶에 있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도록 한다. 우리는 매일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 하기에, 철학에 대해 생각해 볼만한 시간을 갖기가 어렵다. 하지만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이러한 사색이 반드시 필요한 순간이 있을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일에 치여서 지내는 사람에게 왜 돈을 버는지 물어본다면, 아마도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함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 ‘더 나은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우리가 하는 일이 말해 줄 수 없는데, 바로 이때 철학이 그것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인생에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면, 또 정당하고 중요한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지, 혹은 진정한 가치나 의미가 없는 것을 좇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황폐해질 위험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누구든지 어느 시점에서나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생존의 문제에만 천착하게끔 만드는 이 삭막하고 참담한 사회에서, 이러한 그의 해답은 인간답게 사는 데에 있어 철학이 왜 필요하고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하기를 그만두는 순간,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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