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지 말고, Carpe diem.
우울했다.
나의 캐릭터를 대충 아시는 분들은 쉽게 믿지 못하시겠지만..! 사실 최근 나는 조금 우울했다. 근 3개월여간 나의 이야기를 어디 할 수가 없는, 감정의 진폭이 꽤 큰 상태였다. 서른일곱을 먹고 할 소리는 아닐 수 있는데 나는 진심으로 '우울'이라는 감정의 실체를 이제껏 구체적으로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굳이 따져보자면 슬픈 기분이 며칠 계속되었던 건 서른 살 무렵 당시 연애를 끝내고 못 먹던 술을 며칠 먹었던 날들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자기애가 충만한 나는 금세 그 기분을 잊었다. 자전거도 타야 했고 여행도 가야 했다. 나를 채우는 것으로 금세 슬픈 기분을 날릴 수 있는 속 편한 캐릭터였고, 성격은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왜 우울했냐 하면, 지금의 빈자리는 '나를 향한 자기애로 극복이 불가능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 자리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초여름 6월 첫 주말, 딸과 에버랜드 장미원에서 깔깔거리며 사진을 찍고 놀고 있다가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아내의 눈빛만 봐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을 할 수 있었다. 항상 남 얘기이기만 했던, 커다란 병마가 가까운 가족의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 길로 바로 달려갔던 병원에서, 무거운 짐은 주변 가족에 나누고 오로지 회복만, 좋은 생각만 하시라 말씀을 전했던 것 같다. 그 날이, 눈을 마주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마지막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래.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본인께서 끝까지 애쓰셨으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으나 병마는 참으로 무거웠고 투병은 너무 짧았다. 제대로 인사할 시간도 없이 가족들의 하늘에 하나의 별이 되셨다. 무거운 아쉬움, 슬픔에 장례 기간 동안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내가 남편이 되고 아빠가 되고 나서 새로 생긴 마음의 방만큼 더 아팠다. 총각시절 자기애로 극복할 수 있었던 감정들과는 달랐고, 그 빈자리는 이제.. 채워질 수 없는 공간이었다.
괜찮은 듯했다가 가끔 예리한 슬픔이 깊게 찔려왔다. 특히 클라이언트 미팅을 껄껄껄- 하고 돌아서서 운전하여 돌아오는 차 안, 음악도 없이 고요하게 멍-하니 운전을 하고 있을 때가 가장 위험했다. 모든 행동의 효율이 다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아, 우울감이라는 건 이런 것이겠구나..라고, 마치 이마저도 남 이야기하듯 생각했다.
피식-웃음으로 찾은 온기
괜찮은 것 같았다가 갑자기 먼 산을 보았다가 하는 날들은 이어졌다. 일을 하면서도 하기가 싫었고, 진도가 안 나가니 새벽이 되었고, 새벽이 되면 또 힘들었다. 껄껄껄- 여전히 속 편한 배불뚝이 남편이자 딸바보 아빠로 똑같이 살면서도,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아직 완전히 받아들이기엔 물리적으로 시간이 오래 흐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은 한 발자국씩 흘러갔다.
공감 요정인 아내 역시 내색하지 않지만 나보다 더 큰 감정의 진폭을 가까스로 견디고 있을 것이 뻔했다. 아마도 그래서인지 자꾸 외출을 하고 싶어 했다. 바깥에 있을 땐 아무래도 생각의 기회 자체가 줄어드니까. 아내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기에, 나도 어떻게든 같이 나가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엊그제 새 립글로스를 사러 H&B스토어에 갔다.
오랜만에 어마어마한 마케팅 POP들에 휩싸였다. 현란한 색깔, 오만가지 어필 문구가 도배되어 있는 뷰티 매대는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쭉 둘러보니 무슨 신조어가 그리도 많은지! 아마도 마케터들이 피 터지는 고민 끝에 만들어낸 단어들일 것이다. 쭉 둘러보다 쓱.싹.톡. 고밀착 커버! 모공녀인생템! 이라는 단어에 이른 순간 피식 웃음이 났다. 얼마나 고민을 짜냈을까? 하며 말이다.
나도 여전히 사회생활의 총길이를 따지면 FMCG 마케터로 살았던 기간이 제일 길다. 염색약을 팔고, 샴푸를 팔던 ABM시절, 나도 매대 POP에 뭘 쓸지를 두고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던 날들이 있었다. 그때는 싫었는데, 지나고 보니 열정이 가득했던 그 시간들. 치열했던 고민들. 갑자기 그 생각에 웃음이 났다. 가슴속에 불꽃이 다시 느껴지는 듯했다.
이것으로 무언가 대전환이 일어난 것은 전혀 아니었지만 묘하게 기운이 좀 났다. 과거 속 내 열정을 다시 만났던 그 순간이 나에게 다시 힘을 주었던 것 같다.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온기가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스스로 들었던 것을 보면, 나에게 그 마케팅 POP는 정말 큰 역할을 한 셈이다.
당장 오늘 행복해야 한다
커다란 슬픔을 겪어내며 가장 많이 되뇌는 말은 'Carpe Diem'이다. 미래를 위해서 너무 많은 것을 미룰 필요가 없다는 것. 충실한 오늘이 너무나 중요하다. 일을 좋아하지만 일만 하면 절대 안 되며, 최선을 다해서 쉬어야 하고, 노력해서 추억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혼자 책상에 앉아 일하는 시간을 노력해서 줄여보고, 아내와 팔짱을 끼고 동네를 걷고, 딸과 함께 킥보드를 타야 한다는 것. 딸의 사촌들과, 우리 모든 가족들이 더 자주 보고 자주 웃을 일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렇게 오늘 하루하루를 감정적으로 풍부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것 만큼은 예전보다 조금 더 깊은 곳에서부터 의미를 알게 된 것 같다. 매일 다짐하고 있다.
빈자리를 받아들이기에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기에, 슬픔보다는 애써 행복을 이야기하고 싶다. 하늘에서 우리 가족들을 바라봤을 때 보기에 참 따뜻하고 다행스러울 수 있도록 더 많은 추억을 함께 쌓을 것이다. 내 아내가 행복할 수 있도록, 내 딸이 사촌들과 더 부대끼며 웃으며 자라날 수 있도록 오늘 하루하루에 작은 행복들을 계속 쌓아나가야지. 우리는 그렇게 행복들을 매일매일 쌓아 올려야 한다. 후회 없는 인생이란 있을 수 없겠지만, 적어도 그 후회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남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선택 이리라는 생각이다. 단언컨대 이 선택만은 확실하다.
이 글에 결론은 없다. 감정은 여전히 진행형이고, 대단한 반전이나 깨달음도 없다. 그저 글을 쓸 마음이 든 오늘, 토해내듯 그냥 단어들을 쏟아보고 싶었다. Carpe diem이라는 말을 한번 더 문자로 각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는 오늘 하루하루를 정말 아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생각이 참 많이 든다. 건강하게 웃을 수 있는 오늘은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다. 그 오늘을 사람으로, 사랑으로 최대한 많이 채우는 것을 항상 숙제로 여기며 살아야겠다. 너무 스트레스 될 일들은 그냥 등을 돌려버리자. 오늘 당장 행복해지자. 다시 기운을 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