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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인석 Mar 08. 2021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어쩌면 오랜만에 느끼는 평온함

01

지난주만큼이나 나에게 역동적인 때는 없었던 것 같다. 대충 '운'이라는 단어로 떼우기엔 그래도 부단히 노력해 온 삶이었으나, 그 노력만으로 일들이 잘 풀렸다고 하기엔 역시 또 운이 좀 따라줬던 것도 사실이라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열심히 살고 하나 하나씩 몰입해보는 삶을 살아왔고, 그 몰입마다 크고 작은 성취감으로 멘탈에 한겹한겹 굳은 살과 자신감을 쌓으며 올해 서른아홉이 되었다. 인생 전체를 하나의 큰 이야기책으로 보자면 평화롭고 딱히 극적인 속도감이 없는, 그런 인생이었다.


02

누군가에게는 엄청나게 사치스럽고 열받는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평온하게 한칸씩 성장하는 따분한 드라마 속의 나는 한가지의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기울면 어떡하지' 하는 것이었다. 재미없는 주식 그래프마냥, 또는 금리의 변화도 없이 저금리의 얕은 우상향 곡선을 끊임없이 그려온 나는 점점 그 작은 하락조차도 견딜 수 없는 약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공포심이 서서히 자리잡아 왔던 것 같다. 그것을 방지하는 것은 노오오력 뿐이었다. 나는 남들이 깊이 잠들어 있을 시간에 출근했고, 폭풍과 같은 업무를 계속해서 소화해냈으며, 들어오는 일을 거절하지 않았다. 영업을 적극적으로 하진 않았지만 들어오는 문의와 제안은 굳이 손익의 기준을 두지 않고 '융통성'이라는 단어 뒤에서 잘도 해냈다. 그렇게 회사도 끊임없는 우상향 곡선을 그려왔고, 나의 그 유치한 공포심도 작아지지 못했다.


03

이런 작자가 무슨 사업이고, 사장질을 한단 말인가! 라며 혼자 우스울때가 이미 여러차례였다. 리스크 관리가 사업가의 큰 자질 중 하나라면, 나는 큰 것 하나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어찌되었든 그 공포는 역시나 나의 노오오오력과 약간의 운이 더해져 마주칠 일 없이 평온하게, 벌써 6년째 사업적 성장을 지속해내고 있었고, 개인적인 문제나 고민들도 피해 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주 일련의 이벤트들이 벌어지면서 잠시 주춤-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계약을 목전에 둔 프로젝트가 무슨 약속이나 한듯이 무려 4건이나 취소되었다. 물론 계약 취소가 처음은 아니고 이것이 당장 회사에 미치는 영향은 전혀 없는 수준이지만, 거의 다 된 밥상을 4번이나 연속으로 물려간 경험은 처음이었다. 마음이 약간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사업적 이슈가 아닌 개인적으로도 처음 겪어야 하는 감정들을 직면해야만 했다.(개인적인 이슈에 의해 흔들리는게 더 큰 것 같다.) 안꾸던 꿈을 몇차례 꿔야했고, 기분이 제법 요동쳤고, 자주 멍 때려야 했다. 자판을 두드리는 지금도 딱히 해결된 것은 없다. 그렇기에 그 재미없던 낮은 1차함수가 막 변곡점이 생기게 된 것이다.


04

문제의 지난주를 보내고 새로이 시작하는 월요일 새벽의 마음은 다행스럽게도 평온하다. 이 정도의 어려움은 굳이 비교하자면 백신 같은 수준 밖에 안된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겠다. 막연한 공포 속에 있던 진짜 고통과 어려움에는 이르지 않는, 그저 한번 나의 머리속에 경종을 울리고자 하는 고마운 알람 같은 것. 나를 너무 채찍질하며 살았던 것이 '그래봤자'이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누군가 일러주는 느낌.


조금 쉬어가고, 천천히 가도 저 멀리를 보면 차이도 없으리라는 것. 지금 열심히 걷던 이 길 말고, 시야를 돌려봐야만 또 새로운 것도 보일 것이라고. 내가 잡고 있는 손이 아내의 것이고 딸의 것이라는 것도 가슴으로 닿게 되고. 우리 직원들이 보내오는 파일들 말고, 그네들의 얼굴도 보이고.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한주를 시작한다.


05

애써 버티며 무난히 흘러 온 인생.

드디어(?) 일이 조금 꼬이니 마음이 평온하다.

게다가 많이 안꼬여서 다행이다. 진심으로 그런 마음이 든다.


어딘가 물류센터를 오래 떠돌던 택배가 겨우 도착한 것처럼

다행스러운 기분도(우습게도) 조금 든다.


이제 그 상자를 열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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