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경 Jan 13. 2022

군만두, 친절하지 못했던

그래도 사랑해, 아빠

나는 대체로 친절한 편이다. 애교는 없지만 다감해서 사람들과 두루두루  지낼  안다.   차이인 친절함과 오지랖 사이에서 잘도 줄을 타며 직장을 다녔다. 더군다나 광고 대행사였으니, 광고주라면 나는 언제나 클리어하면서 친절해야 했다. 기본적으로 서비스 마인드가 필요했다. 그래서 어쩌면 나의 친절함은 수년간 학습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평소에도 밖에서 마주치는 이들에게 쉬이 친절해진다. 아침에 마주치는 아파트 건물 청소 아주머니께도, 무턱대고 길을 물어보는 낯선 사람에게도. 그런데 내가 유독 의식하며 친절해지려 노력하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우리 아빠다.


아빠는 자상한 사람이다. 가족의 기념일은 연필로 달력에 꼬박꼬박 적어 일일이 챙기고, 운동이나 산책 후엔 양손 가득 돌아오는 걸 좋아한다. 꽈배기든 풀빵이든 복날의 삼계탕이든 동지의 팥죽이든. 집에 있는 나머지 가족들에게 ‘맛있다’ 한 마디를 듣고 싶어서 먼 길을 돌아 사 오는 것이다.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분리배출 등 궂은일도 기꺼이 한다. 외출 시 운전사 역할은 도맡아 하고 심지어 차를 빼러 미리 집을 나선다.


딸 하나 아들 하나, 자식들에게 싫은 소리도 제대로 못 한다. 자식들 눈치 보기에 익숙하다. 정년으로 퇴직했지만 적은 돈이라도 벌겠다고 왕복 3시간에 걸쳐 출퇴근을 하고, 퇴근 후엔 어떤 일이 있어도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는다. 내가 54,000원 치 배달 음식을 결제하면 식사를 끝내자마자 내 계좌로 6만 원을 보내준다(동생은 이를 진정한 창조경제라고 한다). 이외에도 아빠의 초상화를 글로 그려 보라면 몇 줄도 더 쓸 수 있다.


이토록 다정한 아빠지만, 아빠는 식탁에서 조금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아빠에겐, 너무나 치명적인 ‘식탐 버튼’이 있다. 당신이 좋아하는 메뉴나 음식 앞에선 그 버튼이 어김없이 눌려, 눈과 귀를 닫고 흡입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동치미, 부대찌개 등 국물 요리를 너무 좋아하는 탓에 숟가락을 한 번 들면 셀 수 없이 먹는데, 그게 또 꽤나 시끄럽다. 바로 옆에서 숨이 다 찰 정도. 그래서 최근에 엄마에게만 슬쩍 얘기해 식탁에선 아빠와 멀리 떨어져 앉는다.


얼마 전 주말이었다. 저녁 준비 시간을 놓쳐 중식을 시켰다. 자주 시켜 먹던 일반 중국집 대신 몇 천원을 보태 중국 음식점에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주문했다. 그날도 아빠는 굉장히 맛있게 짜장면을 먹었는데, 중간중간 음식이 맛있다고 거듭 칭찬했다. 이 집에서만 세 번은 같이 시켜 먹은 것 같은데 처음이라는 듯 어디서 시킨 거냐며 감탄했다. 음식점 이름을 알려주면 될 것을, 나는 매번 먹을 때마다 그런다고 대답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도 내 말투는 퉁명스러웠을 것이다.


문제는 군만두였다. 시판으로 공장에서 나오는 군만두 같지 않았다. 주방에서 직접 빚어서 튀겼을 것 같은 비주얼과 맛이었다. 8개 중 나는 반 개를 겨우 먹은 참인데, 접시 위엔 어느새 군만두 세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순간 아빠는 젓가락으로 군만두를 집었다. 나는 어떤 망설임이나 고민 없이 말했다.


“거 참 군만두 좀 나눠 먹읍시다”


농담처럼 말하려 했으나 나무라는 뉘앙스가 강렬했다. 아빠를 다그쳤다. 식탐 버튼이 켜진 아빠가 무의식 중에 군만두를 독식하려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수년간의 누적치라는 게 있다. 아빠는 허허 거리며 황급히 젓가락에서 군만두를 내려놓았다. 조금은 멋쩍어하며 가족들을 위해 군만두를 양보했다. 맛있는 거면 일단 먹고 보는 아빠와 그걸 또 저지하는 딸. 못 먹게 하는 서러움과 못 먹게 되는 서러움. 뭐가 더 클까.


자려고 누우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렇듯 ‘내가  너무 심했나싶고, 나는  엄마와 아빠, 특히 아빠에겐 친절하지 못하는 걸까. 내일부턴 다정한 딸이 되어야지 되뇌지만, 다짐보다 짜증이 쉽게 앞선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올더스 헉슬리는 ‘45년의 연구와 공부 뒤에 얻은 다소 당혹스러운 결론으로, 내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조언은 서로에게 조금 더 친절하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가족이라고 왜 빠져 있겠는가. 일할  광고주에게 하는 만큼 가족들에게 친절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화목했을지도 모르겠다. 멀리 떨어진 타인일수록 친절해지는 역설에 불편해하며 이불속에서 몸을 뒤척였다.

작가의 이전글 몽환의 숲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