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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경 Jan 08. 2022

몽환의 숲

미세먼지는 상당히 나빴고 밤이 되도록 안개는 걷힐 생각이 없었다. 저녁 9시에도 하늘은 노랬지만, 목성은 더욱 붉었고 토성은 밝았다. 서울숲엔 그동안 본 적 없는 회색빛 안개가 자욱했다.


커피가 담긴 일회용 잔은 뜨겁지 않았고 플라스틱 뚜껑을 여는 순간 빠르게 식었다. 흙길 위엔 가을과 겨울 냄새가 뒤섞여 있었고 바닥엔 낙엽들이 뒹굴었다. 짙은 먼지와 안개로 길은 멀리 보이지 않았고, 이전에 낮에 왔던 기억들을 되살려 짧은 여정을 만들었다. 걷다 보니 아는 다리가 나왔고, 걷다 보니 아는 잔디밭이 나왔다. 제법 걸었을 수도 있었으나 알지 못했다.


길 한편에 놓인 벤치에 잠시 앉았다. 안개는 고요함을 불러왔다. 살아 있는 것들은 자주 지나가지 않았고, 나뭇가지의 죽은 잎들이 땅으로 툭 소리를 내며 추락했다. 눈앞에 넓은 잔디밭이 어렴풋이 보였다. 작은 소음들은 멀찍이 들렸고, 안갯속을 달리는 강아지들이 그림자처럼 보였다. 동트기 전 새벽 같은 시간 속에서 우리의 이야기는 서로를 천천히 적셨다. 외롭고 불안한 것들이었다. '나'의 것을 '너'는 따뜻하게 바라봤고, '너'의 것을 '나'는 노력 없이 이해했다. 긴 이야기는 습기를 머금은 공기 탓에 퍼지지 못했고, 숲 속의 안갯속으로 우리가 다시 사라질 때도 그것은 제자리의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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