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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에루 Jul 11. 2021

계획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나의 집 나의 독립 01

나의 집, 나의 독립의 8할은 내가 20살이 되던 해에 벌써 정해져 있었다. 


아마 다른 독립 일기들을 보면 우당탕탕 좌충우돌 갑작스러운 결정과 나의 인연인 나의 집을 찾아 헤매는 과정으로 가득 차 있겠지만 내 이야기는 시작부터 다르다. 86년도에 지어진 이 작은 빌라는 내가 20살이 되던 해에 미래를 내다본 우리 엄마가 내 명의로 사둔 아주 작고 오래된 집이다. 


우리 집은 부자도 아니고 집을 그냥 주실 수 있는 형편도 아니다. 내가 20살이 되던 해에 우리 가족에게 벌어진 여러 사건들로 인해 엄마는 내 명의로 집을 사두셔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가지고 있는 소액의 금액으로 가능한 부동산 투자를 해두셨었다. 아마 내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이 집을 처분하여 결혼 자금에 조금 도와주시려고 생각만 하셨지 내가 이 집을 구매하여 들어오리라 생각도 못하셨을 것이다. 


결혼자금 대신 내가 이 집을 받기로 하면서 혼수에 보태라고 주시려고 했던 비용을 제외하고는 시세 차익 및 세입자의 전세금까지 모두 내 돈을 지불하고 가지게 된 나의 첫 집은 80년대 특유의 벽돌 빌라로 빌라인데 복도식이며 지어진 이래로 아무도 리모델링을 한 적이 없어 옛날 알루미늄 샷시에 녹슨 배관부터 골치 아픈 찐 "빈티지" 하우스다. 그런 집이지만  2020년 대한민국 서울에 그것도 강남 3구 중 한 곳에 나만의 집을 가질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금수저라면 나는 금수저가 맞다. 그저 10여 년 전 엄마의 선구안에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다.




남들보다 직장이란 것을 늦게 가지게 된 나는 참으로 대책 없는 사람이었다. 미약한 우울증을 앓고 지나간 20대를 거쳐 갑작스러운 대학원행, 그리고 자퇴까지 여러 가지 좌충우돌을 겪는 동안 그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을 엄마의 마음을 생각하면 미안함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 시절의 나는 나를 어찌하지 못하는 열병을 앓고 있었다. 다행히 더 늦기 전에 나름 정신을 차린 나는 직장을 구해 매달 들어오는 급여로 팔자에 없던 갑작스러운 대학원 학자금 대출을 갚아 나가면서 일 년에 한두 번은 해외여행을 다니며 월급의 달콤함을 즐겼다.


그러나 엄마는 나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급하게 구한 첫 직장에서 비록 프리랜서 경력을 인정받아 무려 경력직으로 첫 취직을 하였지만 크고 유명하지도 않은 회사의 월급은 절대 많지 않았고 나는 남들보다 경제적으로 많이 뒤처져있었다. 그래서 이직을 성공한 두 번째 회사에서 첫 월급이 나오자 엄마는 진지하게 제안했다. 돈 관리를 모두 넘기라고!


결혼 생각이 아직 없는 내가 점점 나이를 먹어가니 규모의 경제를 위해 독립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다. 20대에 엄마와 동생의 해외 살이로 이미 7년간 자취 생활을 한 내게 혼자 사는 것은 새롭지 않았지만 경제적으로 부동산까지 완벽하게 독립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 만큼 단기간에 긴축재정으로 목돈을 모아야 했고 2년간 아주 공격적인 저축을 통해 독립의 기반이 될 자금을 마련하였다.


독립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은 라이프 스타일도 있었다. 7년간의 자취를 경험하고 다시 엄마와 산다는 것 역시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서로를 존중하고 많은 부분을 양보하며 맞췄지만 이따금 늦게 하는 귀가에도 엄마가 신경을 쓸까 봐 눈치가 보였고 주말에 늘어지게 늦잠이 자고 싶어도 가족과의 공동생활을 위해 일어나야만 했다. 집안일을 할 때에도 내 나름대로 만들어온 루틴이 있다면, 간단한 요리를 하려고 해도 재료나 양념의 위치부터 식가 사용까지 엄마의 규칙을 따라야만 했다. 


엄마는 아니라고 말했지만 한 지붕 아래 두 명의 여왕벌은 있을 수 없었다.




집은 정해져 있고 독립을 계획한 2년여의 시간 동안 나와 엄마는 각자의 머릿속에서 이 집의 설비와 인테리어 공사의 최저 비용 최대 효과에 대해 엄청난 고민을 했다. 집 꾸미기를 좋아하고 감각적인 엄마와 건축 설계를 전공한 내가 각자 생각하고, 함께 생각을 나누고 비용을 계산할 때의 즐거움은 지금 생각해도 약간의 흥분감에 심장이 두근 거린다.


엄마는 세입자와 전세 만료 시점을 조율하면서 종종 집을 둘러보고 사진을 찍어왔고, 우연의 일치로 세입자가 건축일을 하는 분이라 간단한 도면을 받은 나는 플로어 플래너를 풀가동 하여 어떤 공사가 하고 싶은지 업무 시간 틈틈이 설계를 했다.


한 번에 지출이 몰리는 것을 분산하고자 미리 오래된 매트리스를 당근하고 새 침대를 사두기도 하고 닥쳐서 짐 싸려면 힘들 수도 있으니 주말마다 하루는 주방 살림을 싸고 하루는 겨울 옷을 미리 싸두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 전세 종료 기간인 7월이 다가왔다.


이런 설렘은 갑작스럽게 동네 부동산에서 엄마에게 전화가 오기 전 까지였다. 




지하, 지층, 2층을 합쳐 총 10가구가 살고 있는 이 작은 빌라에는 놀랍게도 집주인이 다수 거주하는 상태였다. 이번에 내가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들어가면 절반 이상이 실거주자가 되는 상황이었다. 부동산에선 내가 인테리어 공사를 하기 전에 재건축 이야기가 오가고 있고 얼마 남지 않은 동네의 오래된 빌라 중 나의 집을 재건축하고 싶으니 집주인들과 재건축 조합을 꾸리고 시공사 선정을 위해 참여해달라는 것이었다.


재건축.


20살부터 정해져 있던 독립 계획에 재건축은 없었다. 이미 7월 초 나는 대출을 받아 세입자를 내보냈고 집은 공실 상태로 바로 인테리어를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 공사를 재건축이라는 안건으로 멈춰 세운 것이다. 대출 이자는 나가기 시작했고 집을 고쳐 들어가려던 기세와 흥에 찬물을 끼얹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 정도 재건축은 조합에서 공사 내용만 빠르게 정한다면 6~8개월이면 신축이 가능하고 추가 지출이지만 낡은 집을 공사하려던 돈에 조금 더 비용을 보태서 조금 더 넓은 신축 집을 가지게 되는 것은 여러모로 이득이라고 내 자신을 설득했다. 본가에서 서울을 한참 가로질러야 올 수 있는 집이었지만 엄마와 번갈아, 혹은 같이 주말마다 재건축 회의에 참여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갑자기 재건축 로또를 맞아 신축 건물로 이사에 들어가는 핑크빛 미래만 있었다.




10명의 집주인 중 80%가 마음을 일치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제약이 많은 땅과 용적률로 인해 정말 사업성이 좋은 재건축은 어렵지만 재건축 이후 실거주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수였기 때문에 꽤나 순조로운 회의들이 초반에 이어졌다. 빌런 1이 나타나기 전까지 말이다.


지하층 세대를 가지고 있는 부동산을 하는 이 빌런 1은 아주 소액으로 조카의 명의를 빌려 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세입자를 놓고 아주 적은 액수로 투자를 했기 때문에 대다수가 희망하는 추가 세대를 줄이고 기존 세대의 집이 조금이라도 크고 쾌적하게 나오는 계산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빌런 1은 신규 세대를 최대한 뽑아서 그 신규 세대를 팔아 조합원의 부담금을 줄여야 한다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그로 인해 빌런 2가 트리거 되었다.


빌런 2는 실거주자는 아니지만 자신의 어머니가 이 집에 살고 있는데, 무조건 조합원의 생활이 쾌적해지는 집 만을 찬성한다고 강하게 표현했다. 10세대가 살고 있으니 10세대를 지어야지 왜 12세대를 짓냐며 나름의 논리를 펼쳤는데 심지어 신축 시 현재 보유하는 층수 그대로 저층은 저층부, 중간층은 중간층, 고층은 고층으로 간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나름의 논리로 뭐라도 더 개인의 이익을 쟁취하려는 사람이었다. 최대한 고층 집을 자신이 가겠다는 뉘앙스를 숨기지도 않고 풍겨서 빌런 2는 다른 이유로 불쾌했다.


수많은 주말들을 이 재건축 성사를 위해 시공사까지 붙어 도면도 받아보며 많은 이웃들과 함께 고생을 했지만 빌런 1은 히스테리를 부리며 절대 공사비에 6천씩 못 낸다고 자신의 입장만 일방적으로 성질을 내고, 빌런 2는 자신의 집보다 더 넓은 평수와 층수가 아니면 동의를 못한다는 발언들을 했다. 그 마지막 회의를 기점으로 재건축은 없던 일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재건축이 엎어지고 나니 시간은 이미 9월 말이었다.


2달 넘게 시간과 돈을 날린 나는 절대 내 살아생전에 이 사람들과 재건축은 없고, 재건축을 한다면 불도저 앞에 눕겠다는 나름의 빡침을 원동력으로 집 공사에 박차를 가했다.


이 집의 미래 가치성과 비전에 대해 많은 생각이 달라져있었다. 8할이 정히져있어도 나머지 2할은 계획되로 되지 않는게 인생이라는 것을 배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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