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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에루 Feb 24. 2019

그가 꿈에 나왔다 01

에덴 홀을 만나다


몇 달간 입에도 담지 않고 머릿속에도 들이지 않은 그가 꿈에 나왔다.


그와 나는 특별하지만 아무런 사이도 아닌 관계다. 우리는 서로에게 호감과 사랑을 느끼고 실망과 귀찮음도 느낀다. 우연한 계기로 그를 알게 된 건 벌써 8년 전 일이다. 그는 잘 나가는 바의 총괄 매니저였고 나는 지인을 따라 우연히 그가 일하는 바에 들린 뜨내기손님이었다. 아는 칵테일 이름이 몇 년 전 휴학하며 보았던 미드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본 코스모폴리탄이 유일했던 나는 여전히 어른도 아이도 아닌 어설픈 몸에 갇힌 채 인생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 맘쯤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은 얼굴도 몸매도 이쁘고 잘 꾸밀 줄 아는, 게다가 똑똑한데 놀기도 화끈하게 놀 줄 아는 친구들이었다. 어릴 때 같은 학교를 다닌 것 외에는 크게 공통점이 없었지만 우리만이 공유하는 추억들과 유대감이 좋아 어울리던 그녀들은 술도 곧잘 마시고 담배도 피울 줄 아는데 알고 보면 스펙도 좋은 소위 사기캐들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어울릴 때 한 무리로 보이며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가끔은 낯선 남자들과 어울리거나 핫하다는 곳들에 가고 놀 수 있는 시간들이 썩 나쁘지 않았던 나는 범생이에 겁쟁이 같은 속마음을 외면하고 나름 화려하게 꾸미고 무리와 어울리는 것을 즐겼다.


20대 중반이 되도록 나는 얼굴에 베이비 로션 하나도 챙겨 바르기 버거운 사람이었다. 고등학교부터 화장을 하고 어른스럽게 꾸미기 바쁜 또래보다 늦게 눈을 뜬 나는 지난 가을 내 생일날 친구들이 떠 안기듯 선물해준 몇 개의 아이섀도우와 화장품을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얼굴에 바르는 것이 최선이었다.


다행히 볼륨 있는 체형 때문에 쉽게 뚱뚱해 보일 수 있는 것을 두려워해서 나에게 잘 어울리는 옷을 고르는 법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나 자신이 크게 이성에게 인기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캠퍼스 커플이었던 몇 번의 연애를 마치고 프리랜서로 하던 일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기에 나는 혼자서 잘 지내는 생활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날은 생일 파티를 위해 친구들이 모인 날이었다. 신나게 놀고 난 후 친구들 몇몇은 집으로 돌아가고 몇몇은 한잔을 더 하네 마네하며 시끌시끌한 틈을 타 생일 주인공이 내게 슬며시 물었다.


"내 친구가 근처 바에서 한잔 하고 있대. 나는 거기 갈 건데 너도 같이 갈래?"

"그래? 네 친구가 불편해하지는 않을까?"

"괜찮아, 그 오빠도 우리랑 같은 동네에서 학교 나와서 괜찮을 거야"

"음.. 좋아, 늦게까지 놀 거야?"

"잠깐 들려서 상황 보고?"


친구의 생일은 살짝 오른 취기를 기분 좋게 식혀주는 차가운 밤공기가 부는 겨울의 초입이었다. 둘이 함께 취객들과 주말을 즐기느라 정신없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도착한 곳은 캐주얼한 바였다. 모르는 사람은 이 곳에 바가 있는지도 모를 것 같이 요란한 네온사인 간판들 사이에 있었다. 그곳은 솔직히 이런 계기가 아니라면 그 존재를 알 수 없을 것 같은 위치였다.


존재감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바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만의 들뜬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여럿이 와서 즐기는 모습보다 기다란 바를 꽉 채운 사람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아니, 그 바 안에서 생기 있게 일하고 있는 바텐더들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바텐더. 만화나 영화를 통해서 막연히 알고 있던 직업이었다. 갓 대학생이 되고 술이라는 것을 곧잘 마실 줄 알게 되었을 때에는 학교 근처에서 소주를 조금 마셔본 것이 전부였다. 그즈음 사귀었던 남자 친구는 멋에 관심이 많은 동갑내기였다. 우리는 같은 패션 브랜드에 열광했고 같은 영화와 드라마를 즐겨 봤으며 종종 자기 취향의 애니메이션이나 볼거리를 추천하고 함께 시청했다.


그 아이가 추천해줬던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던 '바텐더'는 바텐더에 대한 첫인상을 내게 남겼다. 간단하게 이 작품을 설명하자면 대게 많은 일본 작품들이 그렇듯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신의 글라스'라고 불리는 주인공 바텐더가 긴자의 뒷골목에 있는 에덴 홀이라는 바를 운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덴 홀의 존재도 모르고 스쳐 지나갈 뿐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고 그의 칵테일에서 위로를 얻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


특히 다양한 칵테일의 비주얼, 이름, 그리고 비하인드 스토리들이 줄거리와 함께 나와서, 소주를 벗어나 조금씩 새로운 술을 알아가고 있던 내게 흥미롭게 다가왔었다. 오죽하면 그 만화를 다 본 후 남자 친구와 함께 남대문 수입 상가에 가서 칵테일을 만들 수 있는 쉐이커와 바 스푼은 물론, 기본적인 리큐르까지 사서 돌아와 끝없는 둘만의 칵테일파티를 했었다. 한잔 두 잔 이를 모를 칵테일을 만들어서 조금씩 맛을 보다 보면 금세 기분 좋게 취하게 되었고 주말마다 한 번은 그 아이의 집에서, 한 번은 내 집에서 칵테일을 만들어 마셨다.


즐겨 만들던 칵테일에 들어가던 피치 리큐르가 거의 비워질 쯤엔 나와 남자 친구는 그저 또 한 명의 학교 동기 사이가 되었지만 애니메이션 '바텐더'와 칵테일 쉐이커는 내 곁에 남았다. 친구를 따라 찬 바람을 가로질러 바에 도착한 그날 밤, 나는 서울 한복판에서 나만의 에덴 홀을 만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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