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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운 May 09. 2019

속세

고등학교 동창인 진수가 출가했다는 얘기는 2년 전쯤에 들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바르고 생각이 많던 아이였지만 스님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기에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조금 놀라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진수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며칠 전에 친구 우현으로부터 진수를 만나러 가자는 연락을 받았다. 우현의 말로는 진수가 깊은 산 속에 들어간 것은 아니고, 서울 근교의 절에서 수도하다가 명상을 통해 마음을 치유하는 프로그램을 처음으로 맡게 되었는데 한 번 체험을 해보자고 했다. 진수는 고등학교 졸업 후 10년이 넘도록 한 번도 보지 못했을뿐더러 나처럼 속세에 찌든 사람이 스님을 만난다는 게 좀 껄끄러워 거절했지만, 우현이 몇 번이나 졸라대는 통에 얼떨결에 그러기로 하고 말았다.


하루 전날까지도 가지 않을 핑계를 찾다가 도저히 생각나지 않아 약속한 토요일에 우현의 차를 타고 진수가 있다는 남양주로 향했다.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도착한 곳은 절이 아닌 5층짜리 일반 건물이었다. 3층으로 올라가 우현이 문을 열고 작은 강당으로 들어섰고, 거기에 반듯하게 머리를 깎은 승복 차림의 진수가 있었다. 10년 만에 동창을 만나는 것도 어색한데 스님이 된 친구라니. 진수야 하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스님이라고 해야 할지, 친구라도 존댓말을 해야 하는 건지 고민하던 중 자연스럽게 진수에게 반말을 하는 우현을 보고 나도 편하게 인사를 했다.


진수는 고등학교 졸업 후 짧은 시간에는 풀어놓기 어려운 많은 일을 겪었고,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절을 찾아 은사 스님의 가르침을 받다가 2년 전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고 했다. 법명은 홍명(弘明)으로 세상을 널리 밝히라는 뜻으로 은사님이 지어주셨다고 했다. 좀 더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고 싶었지만, 프로그램에 참여할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까지 전부 열 명이었다. 모두 바닥에 둘러앉아 진수에게 10주 동안 이뤄질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가만히 앉아서 지루한 부처님 말씀을 듣는 게 아니라 참가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뤄지는 마음치유 프로그램이었다. 진수의 진행으로 서로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어서 각자의 삶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아픔에 대해 말하는 순서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온 나와는 달리 다들 프로그램에 깊이 몰입했는지 쉽게 밝히기 어려운 자신의 아픔을 한 명씩 얘기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도 분위기에 휩쓸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상처를 꺼내놨다.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고, 나도 약간 눈시울이 붉어졌다.


명상을 마지막으로 3시간 동안 이어진 프로그램이 끝났고, 진수에게 다음에 보자는 인사를 하고 우현과 건물 밖으로 나왔다. 서른 살 먹은 남자가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 얘기를 하며 훌쩍거리는 모습이 볼썽사납게 보이진 않았을까 후회가 됐지만, 난생처음 겪는 기이한 체험이기도 했다. 내 안에 치유되어야 할 아픔이 나도 모르게 존재하고 있었음을 짐작했다. 프로그램 내내 시큰둥한 표정을 하고 있던 우현에게 다음 주에도 올 거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우리는 참가비를 내지 않고 구경하는 셈 치고 첫 번째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이었다.


새로운 경험이 나쁘지 않았던 나는 다음 주 토요일에 혼자 남양주로 진수를 찾아가 참가비를 내고 정식으로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우현과 다른 사람 한 명이 빠져서 강당에는 나까지 남자 셋, 여자 다섯 명이 모였다. 두 번째 주의 주제는 용서와 이해였다. 나에게 아픔을 준 대상을 떠올리며 원망을 털어놓고 욕도 해보고 그 뒤에 느껴지는 자신의 감정을 파악하고, 스스로를 위해 그들을 용서해주는 시간을 가졌다. 내 뒤통수를 쳤던 친구, 전 직장 상사, 부모님에 대한 원망을 쏟아놓고 마음의 파장을 살피며, 나 자신의 건강한 삶을 위해 그들을 용서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진수의 프로그램은 분명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일에 찌들어 마음에 여유가 없고 무기력하던 일상에 활기가 생기고 가끔 찾아오던 분노도 사그라지는 게 느껴졌다. 프로그램을 소개해준 우현과 무엇보다 친구 홍명스님에게 고마웠다. 그렇게 한 주도 빠지지 않고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어느덧 7주가 지났다.


이젠 프로그램 참가자들끼리도 친해지게 됐다. 깊은 곳에 숨겨둔 속내를 보인 사이다 보니 부끄러울 게 없었다. 다만 끝나고 밥을 먹는다던가 술자리를 갖는다던가 하는 일은 없었다. 이곳에서 있던 일은 여기 안에서만 묻어놓는 게 모두의 불문율이었다. 8주 차 프로그램도 잘 마치고 집에 돌아가려 하는데 진수가 시간 괜찮으면 밥을 먹자고 했다. 프로그램 안에서 별 얘기를 다 했어도 진수와 따로 만난 적은 없었기에 조금 의아했지만 알겠다고 했다.


건물 근처의 산채비빔밥 집으로 가서 비빔밥 두 그릇을 시켰다. 밥을 먹으면서 진수가 한 이야기는 꽤 놀라웠다. 프로그램 참가자 중에 커플이 생겼다고 했다. 나보다 대여섯 살 많아 보이는 그 남녀는 항상 둘이 붙어 다니길래 예전부터 알던 사이인 줄 알았는데, 진수의 말로는 여기서 처음 만나 연애를 하게 됐다고 했다. 문제는 둘 다 가정이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진수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지난주에 그들이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해서 식당에 갔더니 그런 얘기를 털어놓으며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상담을 요청했다는 것이었다.


스님이 사랑을 하는 커플, 그것도 불륜을 저지르는 이들에게 연애 상담을 해주는 상황이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진수도 너무 당혹스러웠다고 했다. 그들에게 뭐라고 상담을 해줬는지 진수에게 묻자 헤어지라고도, 계속 사귀라고도 할 수 없어서 혼란스러울 때는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답이 있을 때가 많다는 뻔한 얘기만 늘어놓다가 급한 일이 생겼다며 자리를 떴다고 했다. 진수는 그들이 분명 조만간 다시 상담을 해 올 듯한데 어떻게 조언을 해야 할지 내게 물었다.


비빔밥을 다 먹고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서까지 답 없는 우리의 토론은 계속됐다. 은사 스님께도 여쭤보기 어려운 문제라서 나에게 물어본다는 진수의 말에 대충 대답하면 안될 것 같았다. 우리 둘 다 최선을 다했다. 진수는 속세에 있을 때의 전 여자친구와의 경험을 떠올리면서까지 상담을 해주려 했는데, 그러다 보니 자기의 마음에 번뇌가 일어난다고 했다. 한참의 얘기에도 결론이 나지 않아 그냥 진수의 손을 꽉 잡아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리석은 중생을 도우려 고군분투하는 초보 스님인 진수가 조금 귀엽게 느껴지다가 스님이 되어서도 속세의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그의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역시 스님이 되는 건 쉬운 길이 아니다. 앞으로는 농담으로라도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아무래도 번뇌로 가득한 이 속세와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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