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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운 May 11. 2019

김애란의 <물속 골리앗>을 읽고

사춘기 소년인 주인공과 어머니는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어 주민들이 모두 떠난 마을의 아파트에 산다. 용접공으로 일하던 그의 아버지는 체불임금 지불 시위를 하러 타워크레인에 올라갔다가 실족사했다. 그들은 철거 명령이 떨어졌지만 집을 구할 수 있는 돈이 없어 전기와 수도가 끊긴 건물에서 겨우 목숨만 부지할 뿐이다. 몇 달간 지속된 폭염 끝에 내리는 비는 장마가 되고,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어머니의 상태는 갈수록 나빠져 간다. 그러던 중 어머니는 죽음을 맞이하고 불어난 물이 아파트를 덮칠 지경이 되자 주인공은 방문을 떼어 배를 만들고 물에 잠긴 마을을 헤쳐나가기 시작한다. 


내딛는 발걸음마다 물기가 스미고 곰팡내가 나는 것 같은 초반의 우울하고 음습한 분위기가 소설의 몰입을 돕는다. 물에 잠긴 마을을 나무배를 타고 다니며 구조를 기다리는 주인공의 모습은 흡사 성서의 ‘노아의 방주’나 대홍수로 잠겨버린 도시를 탈출해나가는 영화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재개발’, ‘체불임금’, ‘철거 명령’과 같은 단어는 소설을 현실의 이야기로 읽히게 한다. 주인공 가족은 모두 힘에 의해 무너져버린 소시민이다. 소년의 아버지는 힘 있는 거대 세력에 저항하다 희생당하고, 어머니는 그런 상황을 가까이서 경험하다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무기력해지고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다. 소년은 그의 가족을 파괴한 골리앗 타워에 맞서는 다윗이다. 


주인공을 가장 위협하는 상대는 홍수, 다름 아닌 자연이다. 인간은 자연을 예측하거나 대비할 수 없고, 냉혹한 자연 앞에서 가만히 기도하거나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자연을 비난하거나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이 소설에서는 개인을 희생시키는 거대한 세력을 자연에 비유한다. 개인의 힘으로는 맞서기 불가능한 존재로 그들을 설명하며, 다수의 이익을 위한 소수의 희생이 마치 자연의 법칙처럼 당연해져 버린 현대의 세태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은 ‘한쪽 편만 드는 십자가’, ‘내가 아는 기도는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색을 지녔다’라는 주인공 소년의 말을 빌려 현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노력 없이 신, 메시아와 같은 초월적 존재에게 기대어 해결되기만을 기다리는 수동적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주인공은 마지막에 비에 젖은 채로 크레인 위에서 밤을 지새우며 “누군가 올 거야”라고 말하지만, 왠지 아무도 오지 않을 것만 같다. 그는 스스로 탈출 해 나가야 한다. 거기에 그의 아버지가 주인공의 아홉 살 생일 선물로 수영을 가르쳐 준 이유가 있다. 아버지가 소년에게 수영을 가르치는 장면을 통해 자신을 향한 세상의 압박에 매몰되거나 외면하지 말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느끼며 천천히 이겨나가는 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소년이 수영을 처음 배우고 나서 수천 개의 별똥별이 소낙비처럼 내리는 광경을 선물로 얻은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가 죽어간 타워크레인 위에서 주인공이 찾아낸 라면 한 봉지와 사이다는 비록 승리하지 못했지만 비굴하지는 않았던 전 세대의 선물 같기도, 소설 속의 세계를 창작한 작가가 소년에게 주는 작은 희망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국 우리를 둘러싼 사회 문제가 개인의 책임은 아니지만, 개인이 작은 힘을 발휘하고 서로 연대하며 서로를 치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듯 하다. 소년은 성경에서의 다윗처럼 골리앗을 이길 수 있을까. 거대한 골리앗을 쓰러트린 다윗의 돌팔매가 물속에서는 소용이 없다는 게 조금 불안하게 느껴지지만, 지금은 그를 조용히 응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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