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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화영 Feb 04. 2023

늦은 첫 번째 이직을 통해 내가 얻은 것

1년 6개월이 지났다.

작년에 고슴도치 한 마리가 우리 집 가족이 되었다. 동물을 좋아하는 딸아이가 이번 생일선물은 무조건 고슴도치라고 몇 주 동안 떼를 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키우게 되었다. 집에서 동물 키우는 것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와이프를 이겨내는 딸의 고집을 보면 분명 나와 와이프를 닮지 않은 구석이 있다. 고슴도치의 이름은 '코코'다.(딸이 지어준 이름이다.) 코코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똥을 많이 싼다. 아니, 아주 많이 싼다. 아침에 똥을 치워주고 저녁에 퇴근해서 집에 가보면  똥 밭에도 기어 다니는 커다란 밤송이를 보게 된다. 그리고 시력이 약한 반면 소리와 냄새에 굉장히 민감하다. 겁도 엄청 많아서 자주 몸에 있는 가시를 세우기 때문에 함부로 만질 수가 없다. 코코를 분양해 주신 분이 얘기하길 집에 데려간 첫날부터 3~4일은 절대 만지지 말라고 했다. 겁이 많은 동물이라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가 어디인지, 어떤 사람들과 함께 살게 된 것인지 , 이 환경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시간이 고슴도치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1년 6개월이 지났다.  


정확하게 18년을 다니던 나의 첫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회사에 입사한 지 1년 6개월이 되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었다. 고슴도치가 그런 것처럼 나에게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출근하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얻었을까?


퇴사를 결정하고 새로운 회사로 이직하면서 내가 얻고 싶었던 것은

나 자신을 또렷하게 하는 것이었다.


나이 마흔이 넘어가면서 나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고 싶은 갈망이 커졌다. 앞으로의 삶을 좀 더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서 나 자신을 좀 더 알아야 했다. 익숙했던 나의 환경을 바꿔주면 나 자신이 좀 더 선명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1년 6개월 동안 내가 알게 된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새로운 환경에 비교적 잘 적응한다.


낯선 사람들과 새로운 방식으로 업무를 하는 것에 거부감이 적다. 지금 내가 일하는 회사는 많은 부분에서 이전 회사와 다르다. 업무의 R&R를 분명하게 나누기보다는 지금 당장 필요한 일에 여러 사람이 집중해서 일을 처리한다. 또한 여러 사람의 합의보다는 리더가 주도적으로 빠르게 결정하고 실행하도록 한다. 상황 변화에 따라 그때그때 의사결정을 바꿔서 실행하기도 한다. 작은 조직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하기 위한 특성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내가 알던 일하는 방식과는 분명 차이가 있지만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도움이 된다. 나는 새로운 동네로 이사 가면 그 동네의 분위기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이해하고, 그곳에 동화되는 것이 비교적 수월하다. 열아홉 살, 서울에 처음 왔을 때 그랬고, 대학에 진학했을 때, 군대에 입대했을 때, 첫 회사에 입사했을 때, 새로운 부서로 이동했을 때 그랬다. 다소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는 것은 분명하다.    


두 번째는 실무를 하면서 안정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지금 회사는 작은 조직이기 때문에 팀장도 담당들과 함께 실무를 해야 한다. 문서를 만들고, 행사를 함께 준비하고, 구성원들과 직접 소통해야 하는 일들이 많다. 작은 회사에서는 소위 짜친 일을 중요한 일인 척해서는 안된다. 반대로 중요한 일을 짜치게는 할 수 있어야 조직이 굴러간다. 회사 운영에 필요한 일이 생기면 모두가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업무를 지시하고 기다리는 것보다는 스스로 일을 할 때 두발을 딛고 땅에 서 있는 안정감을 느낀다.


세 번째는 사람이 주제인 일을 할 때 살아있다는 것을 느낀다.


나는 현재 회사에서 인사팀장으로 일을 하고 있다. 지난 1년 6개월 동안 이런 일들을 해왔다. 회사에 꼭 필요하다고 판단된 사람을 여러 차례 만나서 설득하고 회사에 영입하는 일을 했다. 현재 회사는 다양한 경력의 구성원들이 있는데, 이들이 함께 일하면서 시너지가 날 수 있도록 일하는 원칙을 정하고,  그들이 같은 방향으로 일하며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했다. 구성원들이 일하면서 성장할 수 있도록 새로운 사내  프로그램을 만들고 구성원들을 참여시켰다. 간혹 리더와 구성원 간, 혹은 구성원들 간의 갈등이 발생하면 중재를 하고 갈등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일을 했다. 회사를 리드하는 대표이사의 생각과 전략 방향을 구성원들이 수용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을 했다. 이런 일들이 나의 일의 주제가 되면 나는 열정이 생기고 생기가 돈다. 반면에 제품을 마케팅하거나 영업하는 일은 어색하다.  


첫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회사에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은 나에게 행운이었다. 두 번째 회사에서 일하면서 좀 더 분명해진 것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 사람들의 변화와 성장에 기여하는 일이 나에게 가치 있는 일이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이라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그런 일을 하고 싶다. 아니, 그런 일을 해야 한다.


고슴도치가 이제는 집에 잘 적응한 것으로 보인다.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본인의 집 구석구석을 뒤뚱뒤뚱 돌아다니는 모습이 제법 편안해 보인다. 이제는 대부분의 시간을 작은 우리에 갇혀서 매일 같은 일상으로 지내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게 느껴진다. 얼마나 답답할까. 나는 상상해 본다. 어느 날 고슴도치가 자기 우리에서 당당하게 걸어 나와 그동안 고마웠다고 나에게 작은 발을 내밀며 악수를 청한다. 그리고 홀연히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용기 내어 뒤뚱뒤뚱 걸어간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는 곳으로. 불안과 기대를 함께 짊어지고 씩 웃으면서 말이다. 코코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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