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처럼 살기를 소망하며.
58년생 올해로 예순다섯의 우리 엄마는 늘 어디서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친구가 아주 많고 노래 부르는 것과 꽃, 포도와 춤을 좋아하는 귀여운 젊은 할머니다. 엄마가 아빠를 처음 만났을 때, 아빠는 무려 23번째 남자였다. 아! 오해는 금물, 연애로 23번째는 아니고 맞선으로 만난 23번째 남자다. 맞선을 23번을 보다니. 역시 딸인 나는 아직 엄마 따라가려면 멀었다. 정말 대단한 근성이다.
맞선을 무려 스물세 번이나 보고 만난 사람이 바로 우리 아빠였는데, 요즘 같은 시대에도 아빠 같은 남자와 엄마 같은 여자가 만나 결혼하는 것은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오죽하면 엄마와 아빠의 결혼식날 짓궂은 아빠의 친구들이 “신랑이 미쳤다!”라며 놀렸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아빠는 보기 드문 외모도 되고, 사람도 된 남자였기 때문이다.
아빠가 엄마를 처음 만난 날, 다방의 갓 나온 커피를 세 모금도 채 마시지 않고 엄마에게 우리는 인연이 아닌 것 같으니 그만 일어나자고 했다. 그런 아빠에게 엄마는 “아따 총각! 이 커피나 한잔 다 마시고 일어납시다” 하고 호기롭게 소리쳤다고 했다.
아빠는 내가 본 아저씨 중에 가장 잘생겼다. 젊었을 때 사진을 보니 그냥 아빤 잘생긴 남자였던 거다. 아빠는 적당히 큰 키에 길쭉한 팔다리, 완벽한 계란형의 얼굴과 수려한 무쌍 눈꺼풀의 반듯한 버선 모양의 코가 매력적인 한마디로 느끼하지 않은 담백한 미남이랄까.
그에 반해 엄만 외할머니 농사일을 도와드리며 까무잡잡한 피부에 툭 튀어나온 광대 둥그런 복코, 순박하고 수많은 촌스러운 시골 처녀 중 한사람이었다. 게다가 엄마는 키도 우리 집 여자 중 가장 작은 151 센티미터 였다.
이후 엄마의 적극적인 애정 공세에 아빠는 엄마를 포기시킬 요량으로 “나는 가진 것이 없고 가난한데 나랑 결혼할 수 있겠소?’”라고 물었단다. 오팔 년 개띠 김명순씨는 숨도 쉬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부자로 살게 해줄텡께 걱정을 허덜 마쇼!” 그렇게 남자와 여자는 결혼식을 올렸다.
몇 해 전 우연히 엄마 없이 아빠랑 단둘이 잠들게 된 저녁에 아빠가 나한테만 몰래 해줬던 얘기가 있다. 아빠는 사실 엄마를 처음 만난 날 엄마의 구멍 난 양말과 삐져나온 엄지발가락에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다른 여자들과는 다른 수더분하고 순수한 모습이 좋았다고 했다.
그리곤 결혼한 지 2년쯤 지나 되었을까.. 오빠가 태어났다. 아빠가 일하는 시골 탄광의 사택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엄마는 힘들게 석탄을 캐고 몸을 써 일하는 아빠를 위해 갓난아기인 오빠를 업고 시장에서 자기 몸채만 한 큰 개를 사다가 밤새도록 끓여 보신탕을 끓여 아빠께 드렸다고 했다.
아빠는 어떻게 저렇게 작은 여자가 그 큰 개를 잡아 와 하루종일 고아 요리할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때의 엄마 나이가 지금 내 나이와 동갑으로 이라고 했다. 내 나이 27살이었다. 아빠는 그때 갓 취직이란 걸 해 그제야 지밥벌이를 스스로 하게 된 막내딸이 쏟아내는 사회생활의 불만과 고단함에 대한 대답으로 해주었던 얘기였다.
이후 엄마는 결혼한 지 3년 만에 집을 사서 아빠가 일하는 화순(시골)에서 광주(도시)로 이사했다. 광주로 이사 온 엄마는 슈퍼를 하고 하숙도 쳤다. 또 틈틈히 덤으로 언니와 나까지 낳았다. 주변 지인의 권유로 나가본 보험회사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다니고 계신다.
내가 어렸을 때의 엄마와 아빠는 주중에는 각자의 회사에 다니고 주말엔 외할머니가 계신 나주의 배과수원에 가 할머니 농사일을 도왔다. 평일 엄마의 퇴근은 늘 저녁 9시가 넘었는데 저녁을 먹으며 드라마 한두 편을 보고 나선 늘 새벽 1,2시까지 요리를 했다. 지금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N잡러라 해서 (한가지 직업에만 국한 되지 않고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흔한 개념이 됐지만 우리 엄마 아빤 원조 N잡러였다.
엄마가 한참 회사에서 잘나가던 시절 엄마는 아빠 월급의 두 배는 넘는 월급을 벌었다.
엄마는 엄마의 경제력에서 오는 힘을 떠나 한 번도 무언갈 참고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어디서나 당당했고, 할 말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무조건 다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 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중 가장 대표적 일례는 ‘시집살이’이다. 대한민국 기혼 여자라면 빠져나갈 수 없는 스트레스의 구렁텅이, 시집살이는 기혼여자라면 개인마다 편차야 있겠지만 누구나 조금씩은 겪는 문제일 것이다.
아빠는 51년생으로 아빤 한국전쟁 때 할머니와 할아버질 잃으셨다. 아빠가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을 잃었으니 사촌들과 함께 성장하 크게 되었는데, 이렇게 직계는 아니지만 두어 칸 건너뛴 엄마의 시집살이도 만만치 않았다 곤한다. 무엇보다 할머니, 할아버지 산소 관련해서 친가쪽의 부당한 금전적 요구가 계속되자 엄마는 사생결단을 내렸다. 엄마는 이혼카드를 내밀어 아빠에게 결정을 내리게 했고 그 후 몇 년간 우리는 친가 쪽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이후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됐고 이윽고 우리 가족은 그이름도 무시무시한 IMF란 걸 맞았다. 아빠가 그때 기존집에 무리해서 하나 더 구입한 2층짜리 상가주택은 대출이자가 2,30프로에 육박했다. 엄마는 IMF가 터지고 정말이지 몇년 간은 식사 메뉴를 밥과 김치, 된장국으로 통일시켰다. 나는 지금도 IMF를 떠올리면 밥과 김치 된장국이 떠오른다. 소시지 반찬 하나만 해주면 안 되냐는 어린 나의 간곡한 요청에도 엄만 단호 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다행이 우리집이 은행에 넘어가지 않고 대출을 다 갚고 그제서야 살만해졌다.
내가 취직한 지 얼마 안 되었을 즈음 서점에서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이 꽤 유명 해졌는데 처음 그 소설을 언니와 함께 나눠 읽고 우리는 깊은 우울감과 무력감을 빠졌다. 평소에 사회적 성차별에 대해 깊게 의식하지 못했었지만, 소설을 읽고 나니 왠지 모를 분노와 우리가 살아가는 이사회는 어쩔 수 없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드니 뭔가 기운이 빠지고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발버둥 쳐도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에 막힐 거라면 굳이 아등바등 열심히 살아 무엇하나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까. 언니는 83년생이었다.
그런데 이때 우리는 문득 우리의 ‘김명순’씨를 떠올렸다. 그래. 우리에겐 우리 엄마가 있잖아! 우리 엄마는 소설 속 김지영씨의 어머니 오미숙씨와 동갑인 58년생 개띠였다. 오미숙씨의 인생과 김명순씨의 인생 같지만 달랐다.
우리엄마 김명순씨는 초등학교 5학년때 아버지가 일찍 위암으로 돌아가시자 학교에 가는 대신 농사일을 해야해서 초등학교를 채마치지 못했다.이후에는 통조림 공장에 다니며 오빠들과 동생들 학비를 대었다고 한다. 엄마의 삶은 소설속 김지영씨 어머니인 오미숙씨와 공통점이 많았다. 아마 58년생의 수많은 우리의 어머님들이 그랬으리라..
그러나 김명순씨는 스물세번의 맞선으로 마음의 쏙 드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고, 평생을 큰소리치고 떵떵거리며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40년 가까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엄마는 마흔이 넘어 상대를 졸업한 젊은 설계사들도 따기 어렵다는 보험자격증을 땄고, 쉰이 넘어 면허를 취득했고, 운전을 시작했다. 지금은 엄마가 사무실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 매해 엄마는 회사 내에서 최고 은퇴 나이를 갱신하고 있다. 평생을 뜨겁고 치열하게 온 힘을 다해 살아온 오십팔 년생 김명순씨를 생각하며, 91년생인 나, 박XX 씨 역시 오늘도 고군분투 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