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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무리시 Jan 11. 2022

서른 _ 머리를 잘랐다.






서른_ 머리를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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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스물아홉의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2019년, ᅠ하염없이ᅠ한해가 또ᅠ지나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었다.ᅠ

크리스마스이브지만 슬프게도 내겐 별다른 약속이나 일정이 없었다.

그냥 나에게는 그날이 그날인 12월 22일, 23일과 다를바 없는 24일 이었을 뿐이었다.ᅠ



특별한 일정은 없지만 오전근무를 마치고, 남은 연차나 소진 하자는 마음에 오후 반차를 냈다.

회사를 나와보니,아직도 한낮이었다. 평소처럼ᅠ집에 가서ᅠ드러누워 넥플릭스나 킬까ᅠ싶었지만 그러기엔ᅠ너무 벌건 대낮인데다 벌써 침대로가 눕긴 아쉬웠다.

'아무리 그래도 크리스마스 이브 인데...' 정말이지 이대로 집으로가는건 좀 아니었다.

잠깐 생각끝에ᅠ충동적으로 미용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뭔가 '머리나ᅠ잘라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ᅠ자주가는 미용실로 가기 위해 분당선 쪽으로 몸을 틀었다.ᅠ

평소 퇴근할 때  집으로 가는 3호선 열차에는 나와 똑같은 얼굴로 하룻동안의 고단함이 찌든 직장인들이 몸을 욱여 넣었었다.

그에 반해 분당선 열차 안에는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아 강남인근에서 친구혹은 연인과의 약속을 위해 떠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그들의 얼굴에서 평소와는 다른 연말분위기와 더불어 묘한 설렘과 들뜸이 느껴졌다.

심드렁했던 내 얼굴도 미용실로 가는 동안 왠지 조금씩 약간의 설렘으로 번져갔다.  평소와 다른 설렘, 그건 아마 지겹게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속에서 늘 타는 3호선이 아닌 분당선 열차를 탐으로서 나는 ‘작은일탈’을 개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은 일탈’이 앞으로의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줄지도 모른채, 나는 그저 평소와달리 집이 아닌 미용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였다.




나는 스무 살이 넘은 이후, 그러니까 성인이 된 이후로는 짧게ᅠ 머리를 잘라본적이 없었다.ᅠ

항상 어깨 너머의 길이를 유지했고 머리끝에는 파마를 곁들여 웨이브를 주었다.

흔히 거리에서 많이 보는 젊은 여자들이 많이 하는 머리중 하나였고, 이 머리스타일에 특별한 애정이나 고집해야할 이유는 없었지만, 굳이 바꿔야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 채  10년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모양의 긴머리를 유지하는데ᅠ굉장한 수고가 든다는 것이었다.

보통 어깨 너머 길이의 머리칼을 가진 여자사람이 머리를 감고 말리는 데는 적어도 20분에서 30분정도의 시간이 든다. 하루엔 20분, 일주일에 140분, 한달이면 10시간, 1년이면 121시간 일년에 5일은 꼬박 머리를 감고 말리는데 들어간다니.. 5일이면 웬만한 해외여행도 너끈하게 다녀올수 있는 시간이다.

긴머리를 유지한다는것은 정말이지 수고스런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여름에 지하철안 이른 출근길엔 미처 다 못말린 머리를 손선풍기로 말리는 여자들을 종종 볼수 있다. 또, 추운 겨울 아침에 자칫 머리끝을 덜 말린채로 집밖을 나서게 되면 매서운 추위에 머리끝이 얼어붙곤 했다. 또 가끔씩 특별한날  머리 웨이브까지 할때면 머리 만지는데만 한 시간 가까운 어마어마한 시간이  들었다.   


이렇게나 이런저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 긴머리를 수년간 유지했던 이유는 사실 별거 없이 한가지 였는데,  그건 대부분의 보통ᅠ남자들이 이런 머리의 여자를 이성적으로 더 선호한다고ᅠ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렇게 굳게 믿었던 이유는 영화나 드라마, tv프로그램에서 나오는 모든 인기있는 여자들의 대부분이 긴머리였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건축학개론으로 국민첫사랑의 대표심벌이 된 ‘수지’의 모습처럼 말이다. 사실 수지는 긴머리, 짧은머리, 파마머리, 올림머리, 심지어는 삭발을 해도 예쁠텐데 말이다.


스물아홉 당시 만나는 남자는 ᅠ커녕 '썸' 조차 없었지만 무언가 무의식중에ᅠ나의ᅠ내면 깊숙이에는 '그래도 머리가 긴 여자가 여자답다' 라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내 어정쩡한 긴머리가 [심지어 관리도 잘안된] 내 이성적 매력에 얼마의 기여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믿음은 굳건했다.

나를 이상형이라고 말했던 그 아이에게 있어, 내 긴머리는 몇 프로쯤 기여를 했을까? 그 애가 첫눈에 반했다고 말했던 우리의 첫 만남에 입었던 딸기우유색의 분홍코트는 평소에는 절대 입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이성을 만날 때 입는 옷과 가방,구두가 평소 일상에서 입는 것들과는 많이 달랐다.


이런 맹목적인 믿음과 생각에 균열이 생기게 된 것은 ᅠ무엇 하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었던ᅠ그 당시 내ᅠ상황 때문 이었을 것이다.  

나의 스물아홉, 한해는 정말 아홉수에 걸맞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ᅠ

일도 연애도, 인간관계도…

이 상황을 타파하고자 무언가 내 나름의 ‘노오력’ 이런걸 해봐도 조금도 나아지는 것이 없다고 느껴졌다.ᅠ물속에서 백 미터 달리기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빨리 뛰어야 하는데 몸은 둔탁하게 움직였다.

답답하지만 억지로 견디고 참기만 하는 나날들이 계속되자,ᅠ나는 머리라도ᅠ 내 마음대로 시원하게 자르고 싶어졌다. ‘내 뜻대로 할수있는게 내 머리모양밖엔 없겠다!’ 싶었다.ᅠ

아침에 일어나 추운데 몇 분씩 ᅠ머리를 감고 말리는 것도 싫고,ᅠ 늘 똑같은 거울 속ᅠ내모습도 지겨웠다.

내가 처한ᅠ상황을 바꿀 수 없으니ᅠ머리모양ᅠ이라도 바꿔 버리고 싶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또, 무엇보다 혹시 머리라도 자르면  이ᅠ머릿속에 온통 부정적 이기만한 생각과  잡념들도 다 잘려나가지 않을까? 하는ᅠ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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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미용실에 도착해 보니, 머리 자르는 일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디자이너 선생님은 어깨너머의ᅠ내ᅠ긴 머리칼을 한꺼번에 움켜잡고 단번에 잘랐는데,  

순식간에 잘린 머리와 함께 앞의 거울을 보니 생전 처음보는 낯선 여자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깨 너머까지 많이 길렀는데 아쉽지 않냐는 미용 선생님의 걱정어린 질문과는 다르게 나는 생각보다 시원하게 느껴졌고, 한 움큼 잘려나간 내 머리칼과 더불어ᅠ무언가 그동안 나를ᅠ옭아매고 있던 것들로 부터 왠지 해방 된 것만 같은ᅠ묘한 기분이 들었다.

또, 그간 가지고 있던 해묵은 감정들이 시원하게 씻겨나가는 상쾌함 마저 느껴졌다.


나는 이 낯선 짧은 단발머리의 여자에게서 눈을 뗄수 없었다. 머리를 자르고 하루 이틀은 계속 거울을 보게 됐다. 보고 또봐도 신기하고 낯선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싫지만은 않았다. 낯설었던 내 모습도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그런지 금새  적응이 되었다.


단순히 그저 머리모양 하나를 바꿨을 뿐인데, 나는 좀 더 나다워 졌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보면 머리를 자르기전 긴머리를 고집했던건 '나'의 기준이 아니었다.

또,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일에 관해서든, 모든 인간관계 문제에 있어서든 그 중심에  '나' 를 두지 않았다.

내 생각의 알맹이가 없으니 그 자리에는 다른사람들의 생각이나 가족들의 가치관, 사회적 통념이 그 자리를 메꿨다.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고, 어떤것을 중요하게 생각 하는지 몰랐다. 나는 그런 생각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아마도 어쩌면 애초에 내생각 내신념 가치관이란 것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평범한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세상이란 매트릭스 안에서 평범하게 학교를 다녔고, 당연한듯 회사원으로 길러졌다.


곰곰이 내얼굴을 살펴보니 머리를 자르자 이목구비가 더ᅠ선명해진 느낌이 들었다.

목선은 더 길어보이고 얼굴은 좀 더 작아 보이는것도 같았다. 한결 정돈되고 깔끔해 보이는 내 모습을 보고 나는 생각보다는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음을 깨달았다.

머리를 자르고ᅠ난ᅠ이후 다시 돌아온 내 일상 에서도 약간의 크고 작은 변화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선 머리를 자르니 아침에 머리를 씻고 말리는 시간이 반에 반으로 줄었다.

나는 이렇게 아침에 여유시간이 생기니 오히려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출근전 아침에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특별한건 없지만 저녁에 먹고 싶은 빵을 사두고, 아침에 좋아하는 커피와 곁들여 먹거나 좋아하는 작가의 책읽어주는 팟캐스트를 듣기도 하고, 잔잔한 노래를 듣거나 어느날에는 간단히 명상을 하기도ᅠ했다.

아침에 내가 좋아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니 하루의 기분도 그전보다  조금씩 나아졌다.



새로운 머리에 맞게 옷도 몇가지 어울리는 마음에 드는 것들로 바꿨고,

하나의 작은 시도가 생각보다 퍽 마음에 드는 결과를  낳기 시작하자 다른일들을 할때도ᅠ조금씩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다. 약간의 생기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날 이후 나라는 사람에게 더 관심을 갖기로 했다. 나는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나는 뭘할때 즐겁고, 행복하게 느끼는지 좀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또,일상안에서 때때마다 나는 이 문제에 있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 생각엔ᅠ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또 늘 드는 당연한 판단들에 있어서도 이게 진짜 나의 생각,내마음에서 우러나온 생각 인지도 의심해보곤 했다.



그렇게 한동안의 시간이 흐른 후, 문득 우연히  손을 씻으며 거울을 보니 한층 밝아 보이는 얼굴의 내가 있었다.

동그랗게 잘 말린 짧은 머리에 단정한 모습의 거울 속 여자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짧은머리의 여자의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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