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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석 Oct 15. 2021

춘곤

Cheesecake Vol.1 - Spring

  봄답지 않게, 아니 이쪽이 좀 더 봄다운 것이려나, 아무튼 기승을 부리던 미세먼지가 오랜만에 잦아들었다. 어제 잠깐 내린 비 덕분인지 지긋지긋하던 먼지가 가라앉더니 봄 티를 내며 제법 따스하고, 화사하며, 쾌청한 날씨가 찾아왔다. 덕분에 매일같이 갈아치우는 미세먼지 최고치만큼 올라갔던 우울감이 조금은 가라앉는 듯했다.     


  밖을 돌아다니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오늘만큼은 산책이라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밖에 나가지 못하는 김에 청소도 빨래도 다 끝내 놓았고, 미루던 원고마저 해치운지라 화창한 날씨는 퍽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의 외출을 방해할만한 요소는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예상치 못했던 것은, 모든 면에서 완벽한 봄 날씨가 이상한 쪽으로 효과가 굉장했다는 것이었다. 따스한 햇빛에 모든 의욕을 꿰뚫린 듯, 외출하겠다는 다짐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마루에 드러눕는 것 외에는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나가겠다는 마음은 한 켠에 접어 두고, 마루로 베개와 이불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이런 따사로운 햇살에 낮잠을 잘 수 있는데 그걸 어떻게 참을 수 있나.      


  햇볕을 머금어 바스락거리는 이불. 습하거나 쿰쿰한 기운은 전혀 없는 보송한 베개. 기분 좋게 은은한 나무 냄새를 내는 바닥. 꼭 마음에 드는 적막함. 적당한 따뜻함. 그리고 약간의 졸음. 그야말로 낮잠을 자기에는 최상의 환경이다. 지체없이 이불을 덮고 옆으로 돌아누운 채로 잠을 청해보기로 했다.    


  낮잠은 꽤 매력적이다. 잠 그 자체를 좋아한다기보단, 온갖 번잡한 일상과 피곤에 파묻혀 잠들어버리는 밤과는 달리 잠에 드는 과정을 조금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낮잠만의 매력이다. 잠에 들기 직전, 모든 것이 느려지고 의식이 고요히 부유하는 것 같으면서도 침잠하는 이 느낌. 서서히 바닥으로 빠져들어가지만, 모든 통제를 잃고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활강하며 내려가는 듯한 이 느낌.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조금씩 좁아진다. 이 시야가 닫히면, 내 의식도 잠시 꺼지겠지. 그리고 내가 잊고 있었던 다른 것들이 수면 위로 떠오를지도 모른다.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간만에 느껴 보는 낮잠으로의 진입은 꽤 달콤했다.     




  꿈이 빚어낸 세상은 언제나 종잡을 수가 없다. 지극히 기이하고 비현실적일 때도 있지만, 무서우리만치 현실과 닮아있을 때도 있다. 우울했던 날씨를 철저히 반영한 칙칙한 도시. 가파른 언덕에 빽빽하게 들어선 허름한 집들. 일시적인 해방감을 주는 녹슨 철제 난간. 어느덧 가장 깊은 무의식은 도망치듯 빠져나온 어릴 적의 추억으로 나를 안내하고 있었다.     


  의도적으로 잊어버리려고 했던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별로 간직할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어린 시절에 대해 추억할만한 무언가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다만 다른 소설에서 그런 동네를 묘사하는것만큼 여러모로 지긋지긋했다고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이것이 꿈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다시 한 번 이 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언덕길을 올랐다. 가파른 경사에 숨이 금새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이유를 모를 불안감과 조바심이 걸음을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상은 아무리 오르고 올라도 도저히 가까워지지 않았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처음부터 여기라고 말하는 것처럼, 주변의 공기가 끈적하게 달라붙어왔다. 마치 물 속을 걷는 것처럼 몸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결국 한 발자국도 더 뗄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야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숨을 힘겹게 들이쉴 때마다 폐가 비명을 지르는 듯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왜 그렇게, 떠나고 싶었어?"     


  바람결처럼 들려온 어린 아이의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과 함께 나는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도 분간이 가지 않는 암흑에 휩싸였다.      




  ...서서히 몸에 전원이 들어온다. 한쪽 팔을 베고 잤는지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데도 저릿저릿하다. 몸을 일으켜 보았다. 변덕스러운 하늘은 잠깐동안만 화창한 척을 했던 것이지 어느새 검고 우중충하게 변해 있었고, 봄바람을 맞겠다고 열어놓은 창문 틀에 먼지가 섞인 물이 고인 것을 본 순간, 기분이 나쁠 새도 없이 나는 낮잠의 여파를 수습해야겠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다행히 빗물이 많이 넘치지는 않았다. 나 대신 잠시 외출을 나갔던 우울감과 다시 조우하고, 무기력하게 젖은 바닥과 창틀을 닦았다. 창문을 닫으며 애써 빗소리를 가려보려 했지만, 엉뚱하게도 적막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멀리서 핸드폰이 가열차게 진동했다. 수 미터 바깥에서도 불안감이 느껴져 온다. 봐서 좋을 게 없는 연락일 것 같은 기분.     


  "...여보세요?"

  "아, 네, 보내주신 글 말인데요..."     


  아, 불길한 예감만큼은 왜 빗나가는 일이 없을까.

  원고 수정 문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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