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뗀다. 춥다. 아무래도 창문을 닫지 않은 모양이다. 흐리기는 해도 아직 비가 내리지는 않지만, 온몸을 짓누르는 무거운 공기는 곧 차가운 수적의 무리가 줄기차게 쏟아 내릴 것임을 알려준다. 이미 진한 비 냄새가 전운처럼 집안을 천천히 메운다. 제길, 왜 하필 또 비가 오나. 아직 온몸을 돌고 있는 어젯밤의 소주 기운에 휘청거리며, 사내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불평을 뱉어낸다.
2년 전의 초여름이었을까, 대개 충동이 아무 연유 없이 찾아오듯 사내는 비가 오던 그 날 문득 해방촌이 가고 싶어졌다. 집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삼단우산을 가지고 나오긴 했지만, 사내는 딱히 그걸 펼치고 싶지 않았다. 우중충한 빛깔의 하늘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사내가 원래 원색을 싫어하는 건지, 가져온 우산이 너무 샛노랗다는 핑계로 비를 맞기로 했다. 다행히 창문을 열어 손을 뻗어보니 아직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참이라, 굳이 우산을 쓰지 않아도 많이 젖지 않을 수 있었다. 아무튼, 사내는 늘 메고 다니던 가방마저 거치적거린다는 핑계로 집에 버려둔 채, 달랑 우산 하나만 들고 길을 나섰다.
집을 나와서야 사내는 가볍게 나온다는 게 지나쳐서 핸드폰이고 지갑이고 죄다 두고 나와 버렸다는 걸 알았다. 다시 집에 가서 가져오는 것이야 간단한 일일 테지만, 사내는 그냥 발걸음을 재촉했다. 버스를 탄다면 젖은 옷들 사이에서 억지로 부대껴야 하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숨으로 가득한 눅진한 공기를 마셔야 하고, 내릴 때는 또 그 사람들 사이의 좁은 틈을 어떻게든 비집고 나가야 할 테니까. 평소라면 신경 쓰지 않는 일조차 의식하면 거슬리는 법이다. 결국 사내는 버스를 타는 대신 걷기로 했다.
노들, 신용산, 삼각지... 사내는 지구를 뒤로 굴렸다. 세차지 않은 적당한 빗줄기는 상당히 색다른 자극으로 사내의 머리를 가볍게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비 내리는 날이 이렇게 기분 좋은 적이 있었던가? 신기하게도, 젖는 걸 싫어하던 평소와는 달리 사내는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비를 맞고 있었다. 그래, 그 빌어먹을 푸르죽죽한 버스가 어제로부터 온 도시의 침전을 사내의 셔츠에 튀기기 전까지 말이다. 얼마 튀지는 않았으나, 그 급작스러운 검은 파도는 다시 사내를 정신 차리게 하긴 충분했다.
그나마 흰 셔츠가 아니라 다행이었다고 넘기기에는 사내의 기분이 너무 불쾌해졌다. 하지만 돌아가기엔 이미 집보다는 해방촌이 차라리 더 가까웠기에 그냥 더 걷기로 했다. 이젠 길거리는 멈춰있고 사내가 앞으로 걷는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러던 도중, 사내는 자신이 왜 걷고 있는지를 떠올렸다. 지갑 놓고 왔는데. 이대로는 카페 같은 곳도 못 들어가겠다, 라고 생각한 참이었지만, 그래봐야 이미 늦어서 어쩔 수도 없었다. 왜 이런 생각들은 한 번에 찾아올까. 사내는 불만을 질겅질겅 씹으며 거리를 유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그 날은 진중한 사람들만 거리를 나오기로 한 날인가 보다. 길바닥에 하나쯤은 보일 법한 동전 같은 건 하나도 없고, 일부러 비 맞는 사내를 조롱하는 듯 모두가 거무죽죽한 우산을 든 채 걸음을 바삐 하고 있었다. 그렇게 어지러운 생각에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쯤, 사내는 녹사평역을 거쳐 경리단길을 지나고 있었다.
촤악, 지붕에 고인 물이 떨어지는 소리에 사내는 화들짝 놀랐다. 아무래도 비는 쉽게 그칠 것 같지가 않다. 간간히 보이던 흰 구름조차 간데없는 걸 보니, 조금 있으면 그칠 거라 생각했던 비는 더 오래, 더 세차게 내릴 것 같다. 그래, 생각대로 되는 건 없지. 그런데 왜 비가 내리는 날은 하늘마저 흐려야 하는 건지. 사내는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빗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는 것 같다. 제기랄. 기분 탓이 아니다. 어제 창문 열어 놨었구나. 사내는 투덜거리며 말을 듣지 않는 몸을 힘겹게 일으킨다.
2.
그러나 사내를 기다리고 있던 해방촌은 눅눅하고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사내는 맥이 빠졌다. 내 기억 속의 해방촌은 이랬던 적이 없었는데. 오늘 내가 보고 싶었던 해방촌은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남산 위부터 능선을 따라 내려온 그 잿빛 공간에 밝은 구석이 있다면 사내가 손에 쥐고 있던, 무심하게 흙탕물을 털어낸 노란 우산과 그 대척점에 서 있던 이상야릇한 파출소 옆 소품 가게 뿐이었다. 한동안 그쪽으로는 간 적이 없었다. 무언가 머릿속에서는 내키지 않았지만, 이미 사내의 발걸음에는 오발탄 같은 정체 모를 고집이 있었다.
사내는 그 소품 가게를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을 I라고 소개하던 그 여자와 잠시 이 곳을 들렀을 때, 사내는 여자가 손에 꼭 쥐고 있던 무언가를 꺼내 사 주었던 것 같다. 그 조그만 것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었을 때 I의 얼굴에 떠올랐던 그 웃음을 사내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뭐였지. 사내의 가방에는 그 때도 언제나처럼 유일했던 노란 우산이 있었다.
이내 안쪽으로 꺾어지는 골목에 있던 공방과 옷가게. 사내는 이 곳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가게에서 풍기던 그 때의 기분 좋은 톱밥 냄새가 여과되지 않은 빗물과 섞여 어딘지 텁텁한 기분이 되어 버렸지만, 아무튼 이 곳 역시 사내는 I와 함께였다. 작업실에서 갓 나와 반짝이던 작은 목걸이를 보며, 또 주인이 야심차게 걸어 놓은 예쁜 옷을 보며 좋아하던 I의 옆에서, 엉뚱하게도 조용히 사내는 잠시 걸치고 있는 문명을 미워하고 있었다.
조금 더 걸어 올라가자 가파른 계단이 나왔다. 바다든 강이든 어딘가에서 분리된 방울은 무언가와의 조우를 거부하는 것 같았다. 그 방울들은 억척스레 모여 올라오려는 사내를 거부했다. 기분 좋게 지구를 굴리던 윤활제는 더 이상 없었다. 그러나 계단의 그림은 멀쩡했다. 손잡이를 잡은 사내의 손에 심줄이 튀어 올랐다. 그리고 그 위로 다시 빗방울이 포개졌다. 아니, 포개지는 건 비가 아니었다. 기억만으로 젖은 손 위에 덮인 부드러운 촉감에 사내는 등골이 저릿했다. 그 아래로 보이는 낮은 신발 두 켤레. 그제야...
쨍그랑-
기분 나쁜 파열음. 또 다시 사내는 도리질을 한다. 대체 어제의 사내는 왜 컵을 굳이 창문 옆에 뒀을까. 밖에선 비가 줄창 쏟아지고, 나는 깨진 컵이나 치우고 있고. 끊이지 않는 불평을 씹던 사내의 눈에 문득 어렴풋하게 거기 있으면 안 될 색깔의 유리 조각이 보이는 듯했다.
젠장.
아끼던 컵이었는데.
3.
계단을 다 오르자 구역감이 사내의 온 몸을 쥐어짜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간신히 내뱉은 아니라는 말 사이로 물소리가 끼어들더니, 사내의 기억을 이루던 마디가 찢겨 비명을 질렀다. 그 사이 거세진 빗줄기와 구름의 그림자가 사내를 짓누르자, 다시금 밀려오는 구역감이 사내의 목구멍을 코르크처럼 틀어막아 버렸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 전류처럼 그 신발 두 켤레와 손등의 촉감이 사내를 관통했을 때, 그제야 사내는 자신이 왜 해방촌을 오고 싶었는지 알 수 있었다.
사내는 자책했다. 사내는 그런 이유 따위로 자신이 움직일 줄은 몰랐다. 아니, 그 전에 사내는 자기가 그런 사람일 줄은 몰랐다. 그런 기억을 떠올리면서 또 다시, 처음부터 없었다면 잃어버리지도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하는 자신이 너무도 미웠다. 사내는 사납게 자신을 때리고 있는 물방울들에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지금 자신의 뺨을 타고 머무르는 비처럼 시간의 발걸음을 붙잡아 늦어버린 세월을 돌아가고 싶었다.
I는 비처럼 사내에게 조용히 스며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너를 만날 땐 비 한 방울 온 적이 없었는데. 쓰디쓴 헛웃음. 그녀가 허락한다면 사내는 울고 싶었지만, 그녀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싶었지만, 이미 젖어든 탓에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아니 사내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세찬 빗방울이 썩어버린 사랑니를 가격하듯 온 몸에 열이 나고 욱신거렸다. 사내는 그렇게 잠시 동안 가로등의 이면을 마주했다.
빗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듯, 검은 창문을 무심하게 때리는 물방울들이 빚어내는 소리가 급류처럼 귓전에 가득하게 들이쳐 온다. 그래, 이 소리. 사내는 습한 것이며 옷 젖는 것이며 구름 잔뜩 끼는 것이며 고인 물에 맘대로 걷지도 못하는 것이며 비오는 날씨의 모든 것을 싫어하지만, 특히 빗소리만큼은 정말로 듣고 싶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