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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따로 신앙 따로 무엇이 문제일까? 성경적 직업관

[궁금했성경] 85화, 성경이 말하는 직업의 재발견

by 허두영

1. 우리는 왜 '일'을 이렇게까지 오해하게 되었을까?


대한민국의 크리스천 직장인의 모습은 이럴 것이다. 주말엔 종일 교회에서 예배 드리고, 찬양하고, 나아가 헌신까지 한다. 그것도 나름 열심을 다해서. 하지만, 월요일 아침 지하철 손잡이를 잡는 순간,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이제 현실로 돌아가야지…"


주일의 신앙과 월요일의 현실 사이에 마치 DMZ 같은 보이지 않는 벽이 서있다. 신앙생활은 교회 울타리 안에서, 직장생활은 세상 정글 속에서. 이 묘한 이중생활 말이다. 사실 이는 성경이 아니라 중세 교회가 만든 관념에 가깝다. 중세는 세상을 두 구역으로 깔끔하게 잘라버렸다. 성직(목회)은 거룩한 일, 나머지 직업은 세속적 일. 이 낡은 프레임이 여전히 지금의 교회 속에 살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 중에 이렇게 믿는다. "교회 봉사는 주님의 일, 회사 일은 세상 일", "목회는 소명, 내 일은 생계"


하지만 성경은 단 한 구절도 그런 구분을 한 적이 없다. 성경의 기준은 어디서 일하느냐가 아니라, "누구에게 하듯 일하느냐"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우리가 직업을 신앙과 분리해버린 순간, 주일은 점점 과장되고, 평일은 점점 공허하게 비워진다. 그 결과, 교회는 점점 뜨거워지는데 세상은 미동도 하지 않는 기묘한 불균형이 생긴다.


성경적 직업관을 다시 세운다는 것은, 이 왜곡된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일을 재정의하는 작업이다.


2. 창세기의 원형: 타락 이전에도 일은 있었다


성경은 인간이 죄를 짓기 훨씬 전부터 이미 일을 하고 있었다고 증언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여기서 '경작하다'는 단어는 히브리어 '아바드(עבד)'다. 이 단어는 그저 단순 노동의 뉘앙스가 아니다. 히브리어 사전을 펼치면 이렇게 나온다. '일하다(work)', '섬기다(serve)', '예배하다(worship)' 즉, 아담에게 일은 ‘예배’였다. 삽을 들고 흙을 고르는 행위가, 성전에서 향을 피우는 것만큼이나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제사의 행위였다.


또 하나, 우리가 자주 놓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에덴(Eden)'이다. 에덴의 본래 뜻은 '기쁨, 즐거움, 풍요'이다. 그러니까 창세기를 재구성해보면 이렇다. 하나님이 사람을 기쁨과 풍요의 동산에 두시고, 그곳에서 예배하듯 일하며, 기쁨으로 다스리게 하셨다. 여기엔 우리가 깜빡 잊고 있던 핵심이 숨어 있다. 일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창조의 선물이라는 것. 일은 원래부터 예배였다. 에덴에서의 일은 버티기가 아니라 기쁨이었다. 그렇다면 타락 이후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네가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잘 보면, 저주를 받은 것은 '일'이 아니라 '땅'이다. 일의 본질은 여전히 선하다. 다만,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 땀과 수고, 경쟁과 불안이 그 위를 뒤덮었다. 그래서 성경적 직업관을 회복한다는 건 '퇴사할 용기'를 찾는 자기계발서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 자체의 본래 의미를 다시 붙잡는 일이다.


3. 예수님과 성경인물들의 직업관


우리는 예수님의 3년 공생애는 자세히 이야기하면서, 그 이전의 30년 목수 예수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그분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는 그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마 13:55)

"그가 목수라."(막 6:3)


예수님은 30년 동안 목수였다. 나무를 깎고, 집을 세우고, 사람들의 일상을 받쳐주는 구조물을 만들었다. 그분의 손에는 십자가의 못 자국뿐 아니라, 어릴 적부터 쌓인 수많은 일터의 흔적이 묻어 있었을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하나님의 아들이 굳이 30년 간 직업인으로 사신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예수님은 직업이란 게 얼마나 거룩한 것인지 몸으로 증언하고 싶으셨던 것일지도 모른다. 직업을 '어쩔 수 없는 생계 수단' 정도로 여기는 세대를 향해, "하나님의 아들도 이 길을 걸으셨다"라고 말해주고 싶으셨던 것인지 모른다.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어부, 세리, 혁명가, 장인… 모두 일터의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을 회의실이 아니라 직업 현장에서 부르셨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텐트 만드는 사업가이면서, 동시에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였다. 초대교회는 ‘성직자 중심 조직’이 아니었다. 어부, 천막 제조업자, 세리, 의사, 상인 같은 일터의 사람들이 세운 선교 네트워크였다. 그들은 주중엔 일하고, 그 일터와 가정이 곧 교회였고, 바로 그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가 번져 나갔다. 오늘날로 치면 개발자, 디자이너, 공무원, 금융인, 창업자가 각자의 자리를 선교지로 삼아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모습과 같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직업인들이 채우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4. 종교개혁의 소명론: 루터와 칼빈


중세 교회의 오랜 오해를 본격적으로 깨뜨린 사람들이 있다. 바로 ‘루터’와 ‘칼빈’이다. 루터는 '만인제사장론'을 주창하며 일상의 제사장으로서 소명론을 강조했다. 루터는 성경을 읽다가 한 가지 놀라운 깨달음을 얻는다. 제사장은 목회자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라는 것. 그는 이렇게 말한다. 빵을 굽는 사람,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 농부, 상인, 공무원… 이 모두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제사장이라고. 우리 식탁에 빵이 올라오는 건, 빵을 굽는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루터에게 직업은 하나님이 세상을 돌보시는 섭리의 도구였다. 직업은 그냥 월급 받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세상을 지키고 돌보는 시스템이었다.


칼빈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각 사람이 서 있는 자리를 하나님이 직접 배치하신 자리라고 한다. 어느 도시에 태어났는지, 어떤 가정에서 자랐는지, 어떤 재능을 받았는지, 지금 어느 직장에 있는지, 이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라 '섭리'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칼빈에게 소명이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다.


루터가 직업을 '일상의 제사장직'으로 정의했다면, 칼빈은 직업을 '하나님이 나를 파송한 자리'로 본 것이다. 두 사람의 공통된 외침은 하나다. 직업은 하나님이 부르신 '소명(calling)'이라는 것. 따라서 가장 평범한 일상이 가장 깊은 예배가 될 수 있다.


5. 하나님 나라의 확장


그렇다면 직장은 어떤 곳인가? 조금 과감하게 표현해보자. 직장은 전선(戰線), 전쟁터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가치가 정면으로 부딪히는 최전선. 여기서 우리는 매일 날선 질문을 만난다. "이익이냐, 정직이냐", "승진이냐, 양심이냐", "편안함이냐, 사랑이냐", "남들처럼이냐, 복음답게냐" 사실 우리가 “아, 신앙 때문에 힘들다”라고 느끼는 곳은 예배당이 아니다. 바로 직장이다. 왜냐하면, 그곳이 진짜 내 믿음이 시험대에 오르는 치열한 실전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평범함이 아니라 '탁월함'을 요구한다. 그냥 착한 사람으로 살라고 하지 않는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라."(골 3:23) 여기엔 적어도 세 가지가 포함된다. 누구도 속이지 않는 '정직', 뭐든 대충하지 않는 '성실', "이 정도면 되겠지"에서 멈추지 않는 '탁월함' 이 세 가지는 언뜻 보면 세상이 요구하는 성과 지상주의와 비슷해 보이지만, 동기는 완전히 다르다. 세상은 내 성공을 위해 탁월해지지만,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기 위해 탁월해진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승진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나님은 질서와 아름다움, 선함과 진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다. 우리가 직장에서 탁월함을 실천할 때,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 속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문장이 성립한다. "교회는 직장에서 탁월한 성도들 위에 세워진다." 재정도, 사역도, 선교도, 영향력도 결국 평일에 땀 흘리는 이들의 손에서 흘러나온다.


6. 아담처럼 일하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아담처럼, 동시에 예수 안에서 새롭게 일할 수 있을까? 핵심은 이런 고백이다. "나는 일해서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사랑받았기에 기쁨으로 일하는 사람이다." 세상은 말한다. "성과를 내야 인정받는다." 그러나 복음은 말한다. "너는 이미 십자가에서 인정받았다." 이 차이가 직업적 영성을 갈라놓는다. 세상의 노동이 '사랑받기 위한 증명'이라면, 복음적 노동은 '이미 받은 사랑의 표현'이다. 복음 안에서 일의 방향은 이렇게 바뀐다. 생존은 소명으로, 결핍은 은혜의 충만으로, 경쟁은 섬김과 협력으로, 불안은 신뢰와 맡김으로.


아담이 에덴에서 그러했듯, 우리는 다시 기쁨, 창조, 탁월함의 관점으로 일을 바라봐야 한다. 모든 프로젝트는 하나의 예배이고, 모든 업무는 하나의 제물이다. 우리가 문서 하나를 쓸 때, 디자인 하나를 만들 때, 환자 한 명을 진료할 때, 학생 한 명을 가르칠 때, "지금 이 순간, 나는 하나님께 이 일을 올려드리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그것이 예배다운 직업의 시작이다.


7. 크리스천 직장인을 위한 적용


1) 직업은 ‘선택’이 아니라 창조 명령이다.

나는 어쩌다 이 회사에 들어온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에덴 대신 이 일터에 심어 놓은 청지기다. 직업은 내 스펙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배치(소명)다.


2) 교회 봉사는 소명보다 ‘앞’이 아니라, 소명에 대한 ‘응답’이다.

교회 헌신은 거룩하지만, 직업을 무너뜨리면서까지 하는 헌신은 질서 파괴다. 하나님 → 가정 → 직업(창조 명령) → 교회 봉사(은혜의 응답). 이 순서가 깨지는 순간, 예배는 뜨거워도 인생은 뒤틀린다. “주님, 제가 먼저 직장에서 정직과 탁월함으로 예배자로 바로 서게 하소서.”


3) “일=예배”라는 아바드 정신을 회복하라.

오늘 결재 올리는 문서, 회의 한 번, 전화 한 통이 에덴에서 흙을 갈던 아담의 ‘아바드’다. 업무는 할 일(task)이 아니라 제단 위에 올릴 제물(offer)이다. 그러니 ‘적당히’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릴 만한 수준’까지 다듬어야 한다.


4) 돈을 기준으로 직업을 해석하지 말고, 복음을 기준으로 해석하라.

돈은 일의 목적이 아니라 결과물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사랑받았기에 기쁨으로 일하는 사람”이다. 마음이 돈에 붙들릴수록 일은 예배가 아니라 생존 수단으로 추락한다.


5) 무직의 시간은 버림이 아니라 재편성의 시간이다.

일이 없는 시기는 “하나님이 나를 잊으신 시간”이 아니라, 정체성과 방향을 다시 빚는 하나님의 공방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마 6:32)는 말씀은 지금의 빈자리까지 포함한 약속이다. 일이 없을 때, 하나님은 더 깊이 일하신다.


6) 은사를 직업과 연결할 때 탁월함은 ‘의무’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열매’가 된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세상의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이 커리어 설계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은사가 흘러가는 자리에서 탁월함은 억지로 짜내는 성과가 아니라

성령이 밀어 올리는 열매가 된다.


7) 탁월함은 성과 전략이 아니라 예배 방식이다.

세상은 “성과를 위해 더 잘하라”라고 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 더 잘하라”라고 부른다. 승진과 상여가 없어도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완성도를 추구하는 것, 그것이 ‘주께 하듯’의 실제다. 나는 성과 지표(KPI)의 종이 아니라,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평가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8) 직장은 선교지이자 영적 전선이다.

교회 안에서만 ‘사역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출근하는 순간부터 나는 파송된 선교사다. 전도는 말로만이 아니라, 실력과 인격이 동시에 우렁찬 복음의 확성기가 될 때 힘을 가진다.


9) 평일이 무너지면, 주일 예배는 껍데기다.

교회의 건강은 주일 새벽기도회 출석률보다 월요일 양심과 화요일의 성실, 수요일의 정직이 결정한다. 평일의 직장이 무너지면, 주일의 찬양은 하나님 앞에서 공허한 소음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진짜 부흥은 각자의 책상 앞에서 시작된다.


10) 실패와 불이익은 ‘징벌’이 아니라 일터 제자훈련이다.

실수, 좌절, 누락, 불공정, 평가 절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의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 중심을 다루고 계시다”라는 증거일 수 있다. 구원받은 신분은 이미 십자가에서 끝난 사건이고, 직장에서는 그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드러날 뿐이다. 그러니 매 순간 이렇게 묻는다.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떤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있는가?”


11) 마지막으로, 정체성 선언

“직업은 돈 버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통해 세상을 돌보시는 방식이다. 나는 오늘도 일터에 파송된 제사장이다.”


이제 질문을 180도 돌려야 한다. “어떤 일을 하면 돈을 많이 벌까?”가 아니라 “어떤 자리에서 하나님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 그 순간, 직장은 더 이상 버티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스며드는 최전선이 된다. 그리고 그 전선 한가운데에 바로 당신의 책상, 당신의 자리가 놓여 있다.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인천성산교회 홈페이지: http://isungsan.net

인천성산교회 l 인천이단상담소(상담 및 문의): 032-464-4677, 465-4677

인천성산교회 유튜브: www.youtube.com/@인천성산교회인천이단

인천성산교회 고광종 담임목사 유튜브: https://www.youtube.com/@tamidnote924

인천성산교회 주소: 인천광역시 남동구 서창동 장아산로128번길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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