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는 누구의 자녀인가?

[궁금했성경] 91화, 정체성을 묻지 않는 신앙은 왜 헛바퀴를 도는가?

by 허두영

사람을 분류할 때 우리는 비슷한 기준을 사용한다.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 부지런한 사람과 게으른 사람… 하지만, 성경의 분류는 좀 다르다.


진노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 마귀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 마귀의 자녀는 알겠는데, 진노의 자녀는 무엇일까? 당신은 이들 중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 질문 앞에서 머뭇거려진다면, 이 글을 끝까지 읽어보기 바란다.


1. 진노의 자녀 - 교회 문턱은 넘었지만, 십자가 문턱은 넘지 못한 자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더니 다른 이들과 같이 되었다."(엡 2:3)


'진노의 자녀(children of wrath)'라 하면 마치 화난 하나님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이 단어는 분노(wrath)가 아니라 심판(Judgment)을 뜻한다. 법정 용어다. 하나님이 화를 내고 계신 게 아니다. 우리가 이미 재판정에 서 있다는, 일종의 선포다. 감정이 아니라 상태. 바꿔 말하면 우리는 날 때부터 구원이 필요한 존재였다는 뜻이다.


"나는 딱히 나쁜 짓은 안 하고 살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 하지만, 성경에는 그런 사람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성경은 인간을 중립의 존재로 보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믿음으로 향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두려움 쪽으로, 비교 쪽으로, 자기 기준 쪽으로 흐른다. 그것이 진노의 자녀의 특징이다.


니고데모도 그랬다. 성경을 외웠지만 예수께 듣는다. "거듭나지 않으면 볼 수 없다."(요 3:3) 부자 청년도 그랬다. 흠잡을 데 없는 삶이었지만, 예수께 듣는다. "한 가지가 부족하니…"(막 10:21) 그 '한 가지'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가 왕좌에 앉아 있느냐의 문제였다. 그들의 문제는 '착한 윤리'가 아니라 정체성이었다. 진노의 자녀는 죄를 싫어할 수도, 종교적 열심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한 가지가 비어 있다. 복음 앞에서 무너진 적이 없다는 것. 교회 문은 통과했지만, 십자가는 통과하지 않은 것이다.


2. 그렇다면 마귀의 자녀는?


'마귀의 자녀'라는 표현만큼 불편하게 만드는 단어가 있을까? 그러나 성경은 끝내 이 표현을 지운 적이 없다. "너희 아비는 마귀다."(요 8:44)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놀라운 것은 그 말이 부도덕한 로마 병사에게 향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성경을 지키던 바리새인에게 향했다. 그들은 성경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이용했다.


성경은 마귀의 자녀를 이렇게 정의한다. 복음을 알고도 끝까지 자기주권을 놓지 않은 자. 가룟 유다는 예수를 몰라서 배신하지 않았다. '스승'으로는 받아들였지만, '주인'으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마귀의 자녀란, 하나님이 버린 자가 아니다. 복음을 알면서도 끝내 자기주권을 내려놓지 않은 자다. 성경은 단호하고, 동시에 자비롭다. 모든 사람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마귀의 자녀도 오늘 회개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행 2:21, 고전 6:11)


3.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탁월한 상태가 아니다. 영적인 탄생의 문제다. 신분의 변화다. 성경은 이를 '양자'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법적 선언이다. "너희는 성령으로 양자의 영을 받았고,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롬 8:15) 교회를 다니는 것이 신분을 바꾸지 않는다. 복음 앞에서 항복해야 진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뀐다. 흑암의 권세 아래 있던 존재가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심을 받는 것(골 1:13),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고 완벽해지는 건 아니다. 그 사람에게는 '다시 돌아갈 과거'가 아니라, '새롭게 살아가야 할 미래'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아주 작은 변화가 시작된다. 죄가 불편해지고, 사랑이 책임처럼 여겨지고, 예수님이 '주님'으로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진노의 자녀는 멸망시킬 대상이 아니라 구원할 대상이다. 마귀의 자녀는 하나님이 버린 자가 아니라 복음을 버린 자다. 하나님의 자녀는 착해진 자가 아니라 다시 태어난 자다.


4. 우리가 망설이는 이유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있다. 말씀에도 감동하고, 기도도 하지만 끝내 한 가지를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 이제 제 인생의 주인은 제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그 고백을 넘어가지 못해 신앙은 공전한다. 교회는 다니지만, 아직 자기 인생을 직접 책임지고 싶은 마음. 복음은 이런 인간 마음의 실체를 향해 이렇게 묻는다.


"너는 지금 누구의 자녀인가?"


이 질문은 종교의 질문이 아니다. 존재의 질문이다. 구원의 질문이다.


5. 결론 - 그 질문을 피하지 않을 때


성경은 모든 인간의 시작을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말한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 1:12) 모든 인생은 진노의 자리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진노는 멸망의 선고가 아니라 구원의 초대장이다.

복음은 묻는다.


"누가 너의 마음의 왕좌에 앉아 있는가?"


정체성을 묻지 않는 신앙은 결국 허공을 향한 외침이다. 이 질문이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신앙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착한 사람 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여정. 그것이 시작되는 것이다.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인천성산교회 홈페이지: http://isungsan.net

인천성산교회 l 인천이단상담소(상담 및 문의): 032-464-4677, 465-4677

인천성산교회 유튜브: www.youtube.com/@인천성산교회인천이단

인천성산교회 고광종 담임목사 유튜브: https://www.youtube.com/@tamidnote924

인천성산교회 주소: 인천광역시 남동구 서창동 장아산로128번길 14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매일 짓는 자범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