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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홀랑 Mar 10. 2024

Prolog. 서른을 맞이하며

서른 프로젝트




서른 프로젝트, 서른을 맞아 지금의 나를 기록하





 



2024년 1월, 찐 서른이 되었다.



빠른 94라면 공감할 것이다. 우린 29살을 3번 맞았다. 93친구들과 한번, 94친구들과 한번, 23년 6월부터 만 나이로 바뀌면서 한번. 20대의 끈을 놓지 못하는 약간은 궁상맞은 짓에 지인들은 꽤나 오래도록 혀를 내둘렀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농익은 서른이 되기를 너무나 기대한 탓일까, 나는 아직 부족하다. 예정된 시간들이 다 지나버리고 납기에 닥쳐 바라보니 나는 아직도 버릴 것과 버리면 안 되는 것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어린 사람인 거 같았다.

서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스무 살이 되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던 그 기쁨은 더 이상 누릴 수 없는 것일까, 생각하며 나의 서른이 서글퍼졌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20대 초반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나게 된다면 분명 멋지다고 생각할 텐데 말이다. 경제적으로 독립한 삶은 어릴 적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하던 세계였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 조금씩 노련해지는 회사생활, 자기계발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 어느 부분에서든 나는 치열한 성장의 시간을 보냈다. 스물셋의 나는 '사회적인 가치들에 대한 나만의 생각이 있는 자차를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었고, 지금의 나는 다행히 그 정도는 충족하는 듯하다. 이런 모습을 방황하던 스물셋의 내가 본다면 분명 멋지다고 엄지를 들어줄 건 확실하다. 와, 언니 멋져요.



그런데도 나는 왜 이리 서른의 나를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는가. 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가득 차있다. 막상 닥치면 다 해낼 수 있고 해내야만 하는 내 삶에 주어지 미래일지, 평생 피똥 싸도 얻어내지 못할 욕심과 야망의 영역에 대한 것일지. 가봐야만 알 수 있는 길인걸 앎에도 커리어/결혼/투자 같은 굵직한 것부터, 우리 집 식물의 미래까지 걱정하고 있는 내가 참 안타깝다.







얼마 전 30대 초반의 박정현이 부르는 <꿈에>와 최근 40대 후반이 된 박정현이 부르는 <꿈에>를 연달아 들으며 깨달음을 얻은 일이 있다. 서른 박정현은 정말 화려하고 프로페셔널하다. 노래의 모든 음절과 박자에 온 힘을 다하려는 야망이 보이고, 또 그걸 잘 해낸다. 이거보다 더 잘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다가 최근에 부른 영상을 보았을 땐 정말 말 그대로 경악을 했다. 야망도 보이지 않았고 부드럽게 힘이 빠져있는데, 중요치 않은 버릴 부분은 크게 게이치 않으면서, 꼭 집고 가야 하는 중요한 부분을 집어주며 공간을 압도한다. 둘 다 노련하다고 할 수 있지만 분위기가 아주 다르다. 아주 많이 다르다.




그래서 꿈꿔본다. 나도 십 년 뒤엔 박정현처럼 멋진 성장을 이뤄낼 수 있길.



 

서른의 나는 20대의 내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영역으로 확장되어 성장했던 것처럼,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확장될 것이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목표도 환경도 다 변할것이다. 하지만 어릴적 꿈꾸던 대로 '사회적인 가치들에 대한 나만의 생각이 있는 자차를 가진 사람'이 된 것처럼 방향성만은 설정한 대로 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방금 '듄 2'를 보고 왔는데, 이런 말이 나온다. '두려움은 작은 죽음이다'. 나는 이 두려움들을 이겨내어 삶의 달인이 될 것이다.





서른이 뒤어버린 지금 시점의 내가 무엇을 생각하며 두려워하고, 그래서 어떻게 살아볼 것인가를 정리해보려 한다. 나 자신을 어느 것에도 투영시키지 않고, 나를 둘러싼 다양한 키워드로 나의 과거와 현재를 정리할 것이다. 사실 두 달 전에 시작했어야 했는데, 이놈의 자기계발에 대한 욕심으로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드디어 시작한다. 하여간 정리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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