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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 Apr 22. 2023

⌈판타지ㆍ로맨스 8부작⌋ 기획 개발 16개월째

복합장르 기획 개발 고군분투의 기록

0.

시작은 단순했다. 그냥 재미있었다. 설정을 들었을 때 볼만한 장면들이 번뜩 떠올랐고, 다음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는 아이템이었다. 무엇보다 아이템의 원안자가 절친한 동기이자 동료였다. 경험상 기획개발에서 중요한 요소는 어떤 이야기를 만드는가 보다 누구와 함께 하는가였으므로 아이템과 동료가 모두 더할 나위가 없다면 진행해야만 하는 프로젝트였다. 때마침 나는 새로운 스튜디오에 출근을 앞두고 있었다. 첫 주간회의에서 아이템을 소개했고 단숨에 주목을 받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단 이직한 경력직이 제안한 첫 아이템은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여러 가지 의미에서 나의 행보를 지켜보는 눈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스튜디오에서 유일한 로맨스 장르의 시리즈 기획 개발이 시작되었다. 4월인 이번 달은 16개월째. 이쯤 되니 일단락되는 경험도 있고 무엇보다 잊고 싶지 않기에 기록을 남긴다. 


물론 아직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작은 성공과 실패 사이의 과정을 뚜벅뚜벅 가고 있다. 


사무실 풍경, 기획안 회의/수정/피드백/가상 포스터 작업 (21년 12월 ~ 22년 2월)


1. 복합장르 챌린지

회사의 재미있다는 말에 힘입어 프로젝트는 힘차게 출항을 시작했다. 어렵사리 작가를 찾는 일이 거의 4개월 가까이 소요되었고, 그 기간은 오랜 인연을 보내고 새로운 인연을 맞이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후 대본 계약을 마치고 작가님과 함께하는 본격적인 기획 개발에 들어섰다. 그러나 곧 나와 작가님은 첫 시놉시스를 내부에 공유한 후 난관에 봉착했다. 피드백은 단순했다. '사건이 없다'였다. 판타지 소재가 가미된 로맨스는 아무리 멀리 뛰어도 결국 로맨스이지 않나. 즉, 남녀가 만나서 부딪히고 말 장난하고, 서로에 의해서든 환경에 의해서든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것이 기본 골자다. 도대체 무슨 사건이 부족하단 말인가? 그것이 로맨스 사건의 전부이거늘. 


당장 글을 봐줄 수 있는 사람들 전부에게 글을 보내고 의견을 구했다. 당연하게도 사정을 다 알지 못하는 지인들은 내 고민의 핵까지 근접하지는 못했다. 사실 답은 이미 내 안에 있었다. 


'판타지 소재가 가미된 로맨스 작품은 아무리 멀리 뛰어도 결국 로맨스이지 않나.'

그렇다면 판타지와 스릴러를 전면에 내세우자.
이 장르성을 전면에 내세우면 사건 구조상 인물은 위기에 빠지고 로맨스는 강화된다.  


우리는 최초의 기획과 3개월 간 작업한 기획을 엎었다. 기존에 도깨비였거나 외계인이었던 남자 주인공과 연애하는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는 더 이상 우리의 지향점이 아니었다. 레전드였던 그 드라마들도 벌써 오래 전의 작품이었다. 그와 같은 드라마가 복합장르라고 처음엔 우습게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안이했다. 영상 외에도 수많은 콘텐츠들이 쏟아지고 경쟁하고 급변하는 시대였다.


우리가 지향하는 복합장르의 구조는 스릴러 플롯, 판타지 미스터리 플롯, 주인공들 각각의 전사와 성장 플롯,  로맨스 플롯 등 최소 4개의 라인의 실을 곱게 땋아야 했다. 게다가 8부작. 참고할 작품도 없거니와 성공한 사례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나와 작가님 모두 하나의 견고한 플롯을 파고드는 영화 업계에서 일을 시작했던 이력이 있어 준비를 아무리 해도 머리를 맞댈 때마다 어렵다고 서로에게 하소연했다. 작가님은 레퍼런스를 닥치는 대로 찾았다. 글을 쓰는 도중에도 소설, 영화, 드라마, 그래픽노블의 B급에서 C, D까지 마다하지 않고 소화했다. 기획 방향이 바뀌면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작가님은 돌파구를 찾아왔고 결국 '사건이 없다'는 회사의 피드백을 넘어섰다. 더불어 회사 내부의 다른 의견들도 방향성에 있어서는 일단 긍정적이었다. 


기획 프로듀서 입장에서 방향성을 잘 잡았다면 일단은 안심이었다. 더 구체적인 톤 앤 매너, 특히 캐릭터를 잡기 위해 올해 1월~3월 대본 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3월 중순의 어느 날. 2부 대본까지 읽고 난 후 나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퍼즐이 몇 개 비어있었다.


두 번째 만남, 계약날, 고민들, 영향받은 것, 회의 후 식사, 레퍼런스 영화 관람 (22년 6월 ~ 23년 1월)


2. 평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책임지고 대안 제시를 하는 것이 프로.

대본을 읽으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작가의 상태다. 명백하게 작가님은 우리의 이 도전적인 복합장르를 버거워하고 있었다. 회의에서 의견을 전달하는 것은 지금 단계에선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나의 유일한 목표는 이 프로젝트의 대본을 재미있게 뽑는 것.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내가 해야 할 일은 작가님의 어려움을 '듣는 것'과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라면 최선을 다해 '돕는 것'이었다. 


작가님만의 감성과 강점이 있기에 그 부분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어떤 단계에서는 무한한 상상력과 가능성이 더 괴롭고 난해하다. 먼저 이 판타지 상상력의 한계를 설정하기로 했다. 그래서 회의 전에 배경 스토리와 세계관을 썼다.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패드 혹은 에이포 용지를 탁탁 두드리고, 미간을 좁히고 쓰읍 미심쩍은 숨을 들이키며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일하고 싶지는 않았다. 함께 프로젝트를 하는 동료로서 작가님과 같은 곳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례를 감수했고, 향후의 피드백에 대한 책임과 비난을 감수하기로 했다. 


이후로 매주 생각한 것들을 가져와 회의를 진행했다. 컨셉과 기획 방향이 분명해지고, 러프 대본도 나왔고, 세계관이 정리되자 회의는 그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우리의 회의는 늘 6시간 이상이 기본이었다. 최근 한 달 사이에 네 차례 진행한 회의는 지난 그 어떤 회의보다 강렬했다. 오죽하면 회사 동료 피디님이 회의실 넘어서 들리는 나의 우렁찬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고 평했다. 신기한 일이다. 기획 개발하는 매 순간은 항상 위기인데 항상 재미있다. 다른 프로젝트와 지난 일들을 회고해 보니 즐거운 프로젝트는 이유가 있었다. 역시 '사람'이었다. 



3. 실패해도 괜찮다. 함께 일한 과정이 천금이니까.

이 프로젝트의 가장 큰 난관은 작가를 찾는 일이었다. 찾는 일 자체가 오래 걸리기도 했고, 사람은 겪어봐야 아는 거고, 특히 일은 손발을 한번 맞춰봐야 아는 법이므로 신중하고 신중했다. 지금은 작가님 말고 다른 작가와 함께 작업했다면 어땠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어느덧 작가님과 작업한 기간이 9개월째가 되었다. 


기획 프로듀서는 작품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 모든 과정의 중심에 있다. 그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간다. 그 사람들 중에서 나와 가장 잘 맞아야 하는 사람은 작가, 즉 대본/시나리오를 쓰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기획에서 시작된 작품을 제일 먼저 세상에 내놓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책'(대본/시나리오를 업계에서 책이라고 부른다)이 기획의 가능성 있음을 증명하고, 다른 모든 프로세스를 시작하게끔 만든다. 


성공하면 모든 과정이 재미있었다고 생각하게 될까? 성공도 중요하지만 내 인생의 대부분의 나날들은 결실보다 과정에 있다. 매일매일이 즐거웠으면 좋겠다. 그래서 적어도 함께 작업하는 사람끼리는 서로 호감을 가져야 하고, 서로를 존중해야 하고, 서로를 궁금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걸 알게 해 준 것이 작가님이었다. 그래서 나는 응원했다. 진심으로 말했다. '잘될 거예요. 걱정 마세요. 실패해도 괜찮아요. 실패하기 전에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죠. 후회 없이.' 정말 괜찮다. 함께 일한 과정이 천금이었으니. 


'실패해도 괜찮긴. 피디가 할 말이냐. 무조건 성공시켜야지.' 내면의 평가자는 끊임없이 입을 놀리지만 성공은 내가 열심히 할 수 있는 영역 바깥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 그리고 우리는 그저 오늘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다. 어렵더라도 더 재미있는 방향이면 기꺼이 걸어가는 것, 사람들의 의견을 참고하되, 최우선으로 우리를 만족시키는 것. 용기와 패기를 가지고.


4. 그리고 23년 4월.

4월도 마지막 한 주를 남겨두고 있다. 현재 작가님은 대본 수정고를 작업 중이시고 나는 기획안을 다시 쓰는 중이다. 앞으로 대본이 어떻게 나올지, 우리가 또 어떤 위기를 맞이할지, 프로젝트의 향방이 어떻게 될지 사실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미래에 대해서 딱 하나 확신이 드는 것은 있다. 어떤 결과가 되더라도 설령 내가 이 업을 하지 않게 되더라도 23년 4월의 봄날은 잊지 못할 것이다. 이토록 정성스럽게 기록에 남기며 마음에 새겼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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