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혜 Jun 24. 2023

나다운 기획에 대한 탐구 기록

경계가 사라진 가장 멋진 시대에서

0. 2023년 6월, 일과 관련하여 나에게 묻고 싶은 질문

리추얼 플랫폼 밑미에서 문화기획자 김해리님의 <내가 좋아하는 일의 한 장면 찾기>라는 리추얼 프로그램을 매달 신청해 이어가고 있다. 내가 이전에 하고 있던 기록은 브런치, 노션에 모닝페이지와 작업(기획) 일지, 아날로그 일기장 등으로 그 내용은 내 일에 대한 생각과 고민이 대다수였다. 다만 그 기록들은 꾸준하지 못했고 브런치 외에는 일종의 감정의 토로용에 가까웠다. 리추얼을 시작하면서 간헐적인 감정의 분출로 그치던 기록의 결이 점점 바뀌었다. 이 리추얼이 좋은 이유는 매일 하루를 돌아보는 꾸준한 기록들이 나를 긍정하고 가진 것에 감사하게끔 하고 무엇보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느덧 나의 일에 대해 작성한 기록들이 네 달치가 모였다.


매달 첫 주에 리추얼을 시작하면 나에게 묻고 싶은 질문 하나를 설정해 스스로 그 질문을 상기하며 한 달간 힌트를 찾아간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지만 매달 질문에 대해 나만의 답을 하다 보니 이제는 마치 한 계단을 오르면 다음 계단을 오르듯 자연스럽게 질문이 떠오른다. 이번 달 내가 던진 질문은 다음과 같다. 


나다운 기획은 무엇인가?


6월에 내내 이 질문을 던지면서 나는 참 낯간지럽기도 했고 어떤 의미에서는 새삼스러웠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영화감독을 꿈꾸고 있었고 일기장에 내가 좋아하는 것, 나의 취향, 나의 스타일이 무엇인지,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기록해 왔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컬하게 대학교에 가서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전혀 알 수 없게 되었다. 단순히 이게 좋다 저게 좋다로 정리할 수 없는 더 다양하고 방대한 세상을 알게 된 것이다. 일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아예 업계의 모든 것을 배우는 자세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오면서 어느덧 이 질문이 나에게로 돌아왔다. 아직 환경이 다 갖춰진 것은 아니지만 이젠 어느 정도 내가 그리는 대로 세상을 그려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침내. 


그래서 나다운 것은, 나다운 기획은 무엇이지?


1. 방법론에 대한 고민

나가오카 겐메이는 <디자이너 생각 위를 걷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최고의 창조는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경우이건 결과적으로 '감동'이나 계기로서의 '아이디어'가 없으면 창조는 탄생할 수 없다. 사람을 감동으로 이끌어가는 것, 사물은 모두 창조다. 

오스틴 클레온의 <아티스트처럼 훔쳐라>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이디어의 족보
당신은 사실 당신이 자신의 삶에 받아들이는 것들의 혼합물입니다. 당신은 영향을 받은 것들의 합입니다. 독일 작가 괴테는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으로 형성되고 만들어집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입력이 쓰레기라면 출력도 쓰레기


아티스트는 수집가입니다. 호더가 아닙니다. 차이점이 있습니다: 호더들은 무차별적으로 수집하고, 예술가들은 선별적으로 수집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정말로 사랑하는 것들만 수집합니다. 당신의 일은 좋은 아이디어를 수집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좋은 아이디어를 수집할수록, 그 중에서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넓어집니다.
"영감을 불러일으키거나 상상력을 자극하는 어디든 도둑질하세요. 옛날 영화부터 최신 영화, 음악, 책, 그림, 사진, 시, 꿈, 우연한 대화, 건축물, 다리, 길거리 표지판, 나무, 구름, 물체, 빛과 그림자를 탐구하세요. 영혼에 직접 다가오는 것들만 훔쳐가세요. 이렇게 하면 당신의 작업(그리고 도둑질)은 진정성을 갖게 될 것입니다." - 짐 자무쉬


당신 자신의 가계도를 올라가라


마르셀 뒤샹은 "나는 예술을 믿지 않습니다. 예술가를 믿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사실 공부하기에 꽤 좋은 방법입니다. 당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한 명의 사상가, 작가, 예술가, 활동가, 롤 모델을 골라 깊이 탐구하세요. 그 사상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공부하세요. 그리고 그 사상가가 좋아했던 세 명의 다른 사람들을 찾아 그들에 대해 알아내세요. 이를 가능한 한 많이 반복하세요. 최대한 가장 높은 곳까지 나무를 올라가세요. 나무를 짓고 나면, 이제 자신의 가지를 시작할 때입니다.
자신을 창조적 계통의 일부로 인식하는 것은 당신이 자신의 작품을 시작할 때 덜 외로움을 느끼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제 작업실에는 가장 좋아하는 예술가들의 사진을 걸어두었습니다. 그들은 친근한 유령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책상 위에 굽혀 앉아 작업할 때, 거의 그들이 나를 앞으로 밀어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다운 기획을 찾는 여정은 결국 내가 감동했던 것, 좋아했던 것, 끌리는 것에서 시작해 그 계보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고 거기에서 새롭고 재미있는 조합을 떠올리는 것이 곧 아이디어이며 창조가 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번 달에 질문에 답하기 위한 방법론은 무엇이 있을까? 그래서 내가 시도해보고자 했던 것은 다음과 같다. 


Step1.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힌트를 찾자. 

영감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생각했다. 분명 나의 일상 속에, 내가 진행하고 있는 일의 어떤 부분에 힌트가 있을 것이었다. 사실 나는 거의 매일 영화와 드라마 및 각종 컨텐츠를 숨 쉬듯이 보고 있다. 업계 동향 파악, 개인적인 유흥, 작품을 위한 레퍼런스. 무엇이 되었든 꾸준한 인풋은 아마도 평생 내가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인데 그간 제대로 기록을 남기면서 본 적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컨텐츠 로그 작성

단순 감상만 있어도 된다. 내가 인상 깊게 본 장면들이나 단어들만 기록해 둬도 분명 더 오래 기억될 것이다. (리추얼을 하면서 나의 뇌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며칠만 기록을 빼먹어도 무엇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날 때의 충격이란.) 업계에서 처음 일할 무렵에는 감상하는 모든 영화의 타임코드를 기록해 줄거리를 작성했다. 구조 분석을 위해서다. 이번에도 타임코드를 한번 기록해 보긴 했지만 구조 분석을 위해서라기보단 시퀀스별 연출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구조가 단순한 액션 영화나 블록버스터들은 너무나 친절하고 칼 같이 30분마다 구조가 바뀌기 때문에 딱히 기록할 필요가 없기도 하더라. 

검토 요청 작품 리스트, 추천작 리스트 눈여겨보기

회사 특성상 종종 영상화나 공동제작을 위한 제안이 많이 들어온다. 단순히 한 두 작품이 아니라 거의 카탈로그 수준의 많은 작품들이 리스트업 되어 있다. 물론 거기에서 조건에 딱 맞는 작품을 찾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안받은 것이라면 허투루 보지 않는다. 제안 자체가 감사한 일이고, 어디서 어떤 인연으로 아이템을 만나게 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에는 한 가지를 더 유념하여 검토했다. '단 한 줄만 봤을 때, 다 떠나서 그냥 내가 끌리는 아이템이 무엇인가' 이 기준에 따라 작품들을 추가로 체크했고, 해당 아이템의 장르, 아이템의 원형, 이야기적 공통점을 찾아 분류했다. 


Step2. 안테나 바짝 세우기: 끌리는 것에는 뭔가 이유가 있다.

역시 문화기획자 김해리님의 영향으로 <신화적 상상력과 문화>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 나 역시 영웅 서사와 신화를 참 좋아한다. 어릴 적 나를 가장 매혹했던 이야기는 이집트 신화와 그리스 로마 신화였고 한때 꿈이 고고학자이기도 했다. 한창 호기심 많은 중학교 시절에는 엄마의 장서였던 19금 완전판 아라비안 나이트에 푹 빠져 있기도 했다. 이 책에서도 직접 서술하고 있듯이 영화, 드라마, 게임, 애니메이션, 소설 등의 대중 매체에서 끊임없이 신화를 소재로 하고 모티브로 하여 작품이 만들어지고 있고, 사실 신화라는 것 자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의 원형이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기도 했다. 


사실 책의 내용보다는 오히려 이 책 자체가 나에게 번뜩이는 영감을 주었다. 작품 세계를 넓혀 가기 위해 역사와 인문학만 염두에 두었으나 신화학이라는 분야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너무 잘 알고 있는 이집트, 그리스 로마, 북유럽 신화보다 그간 잘 알지 못했던 인도나 중국, 그리고 우리의 신화가 더 궁금하고 끌렸다. 그리고 가장 나다운 기획의 핵심이 되는 단어를 찾았다. 


그것은 바로 환상성


하물며 숨을 돌릴 때 아무 생각 없이 ott 사이트에서 보고 싶은 작품을 선택한 후에도 반드시 나에게 질문하고 기록했다. 왜 지금 이걸 보는 거지? 무엇 때문에 여기에 끌린 것이지? 


2. '나다운 기획'이란 정의에 대한 고민

내가 생각하는 대로 세상을 그려갈 수 있다고 해도, 그저 내 멋대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만드는 일은 진정한 의미에서 기획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대한 제작비가 들어가고 결코 혼자서 만들 수 없는 태생적인 특징 상 영상업계의 작품은 나만의 작품이 아닌 모두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다운 기획'은 정확히 어떻게 정의를 내릴 수 있는지 고민해 보게 되었다.

 '나다운 기획'이란  
내가 좋아하는 것 + 내가 잘하는 것
+ 세상이 원하여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기획


기획은 나를 제외하고는 성립될 수 없다. 무조건 나라는 사람의 특수성에서 싹을 틔운다. 다만 그 싹이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커다란 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내가 좋아하기만 해서는 안되고 '잘해야'하며, 그렇게 잘 만들어낸 것이 세상이 원하는 것이거나 가치가 있어 대가를 지불하게끔 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3. My Favorite: 분류

떠오르는 대로 정리해 본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대략적인 분류

4. 경계가 사라진 가장 멋진 시대에서 

전 지구적으로 환경파괴와 경제불황과 전쟁의 문제를 겪고 있으니 마냥 좋은 시대라고 할 수는 없다. 장르와 매체,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가 혼재되고 앞으로 인간과 기계의 경계마저 사라질지도 모른다. 생명체면서 시간에 얽매여있는 이상 변화는 당연하고, 기존 가치도 새로운 가치로 바뀌면서 마치 생명체처럼 변화를 거듭한다. 그럼에도 세상은 늘 나에서부터 시작하고 나의 죽음에서 끝난다. 나라는 깊은 우물에서 퍼올린 것들, 내가 사랑하는 많은 것들이 마치 각 지류가 모여 거대한 대양이 되듯이 그 어떤 세상에서라도 감동(touching)과 재미(entertaining)를 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23년 6월의 나다운 기획에 대한 탐구에서 얻은 소소하면서 원대한 성과이다. 




이전 11화 5월, 끝없는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