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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 Sep 28. 2023

타고난 흥부자의 평온을 위하여

도전은 계속 된다

0.

지난 7월은 무척 뜨거웠고, 즐거운 일도 많았지만 아무런 성과가 보이지 않아 축축 처지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7월은 늘 그랬다.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 장마의 시작, 함께 사는 우리 두 식구의 생일이 있는 달, 한 해의 절반 이상을 달려왔기에 휴가를 앞두고 활활 타오르는 정점. 다양한 의미에서 명암이 대비되는 그런 달이었다. 지랄 맞은 날씨, 피로의 극단, 흥분의 고조라는 원투펀치훅에 녹다운 상황의 나는 8월에 들어서며 결심하게 된다. 잔잔하고 평온한 내면을 유지하는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고. (방법을 찾고 시도하는 여정은 9월을 마무리하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라라랜드, La La Land>(2016)

1. 타고난 격정가, 제 흥에 겨운 흥부자

회사 행사를 끝내고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였다. 나는 지난밤의 술자리에서 취하고 잔뜩 고조되어 친하든 친하지 않든, 본 적 있든 없든, 모두에게 스스럼없이 대했던 내 모습을 떠올리며 소름이 끼쳤다. 세상은 환하고, 사람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이성적인 아침이라 수치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불을 몇 번이고 찼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특별히 실수한 일도 없었고, 주변 사람들은 멀쩡한 사람으로 보였다고 증언했으니, 넘어가도 괜찮았지만 수치심과 괴로움은 그 후 일주일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여러 번 하이와 로우의 정신상태를 오갔고 그 낙차의 충격의 여파는 꽤 길게 갔다. 그럼에도 계속 이런 상황이 이어졌던 이유는 아무래도 가장 밑바닥에는 나의 타고난 기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사람들 앞에 나서서 김흥국의 호랑나비춤을 추던 네 살배기 아이, 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 마당에 불을 내는 말썽쟁이, 아이들을 모아놓고 새로운 게임을 고안하며 눈을 빛내던 소녀,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인기를 얻고 싶었던 관종. 그것이 나였다. 마냥 사람을 좋아하고, 순한 성격이었다면 그쯤 했을 텐데 원하는 것이 매우 확실하여 잘 안 되면 사납게 악에 받치는 독함도 나의 기질이었다. 어쩌다 보니 편도체를 자극시키는 요소는 고루고루 갖춰놓았다. 제 흥에 겨운 흥부자, 부당하고 억울한 것을 못 참는 격정가. 어쩌면 오랫동안 담배를 피웠던 것도 이런 이유와 연관되어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시작하게 된 계기도 그렇고, 담배는 마약으로 치면 'High'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 'Down' 시키는 종류니까. 


<뜨거운 것이 좋아, Some Like It Hot> (1959)

그 기질이 활개를 피게 된 것은 사회적인 지위의 변화와 연관이 있었다. 회사의 프로젝트를 대표로 맡고, 각 프로젝트에 대한 판단과 결정을 직접 내리는 팀장급 피디가 되면서 발언권이 많아졌다. 먼저 말을 시작하는 사람이 되었고, 각종 비즈니스 멘트들을 살갑게 선뜻 내밀어야 하는 상황이 많아졌다. 모셔야 할 상사가 있거나, 챙겨야 할 후배가 없으니 자유로웠지만 그것은 곧 내가 각개전투의 달인이 되어 여러 사람의 감정에 대응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러한 감정의 과잉, 고양 상태가 못 견디게 싫다거나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업계의 분위기도, 하고 있는 일도, 기질도 모두 천둥번개에 비바람이 몰아치는 폭풍우와 같아서 어떻게 이렇게 직업을 잘 선택했냐 싶다. 동시에 흥분해서 눈을 반짝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주고, 드라이브를 거는 것도 내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이다. 다만 내가 신경 쓰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이런 방식이 일을 오랫동안 지속하는 데에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계속해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건강해야 했다. 



2. 고양-가라앉힘의 사이클

폭풍우와 같은 기질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내가 원한다면 잔잔한 호수 같은 내면을 그리고 방법. 새로운 것을 찾아보기보다는 내가 이미 하고 있는 것으로 시작해 보자고 생각했다. 

<노매드랜드, NomadLand>(2021)


먼저 내가 언제 가장 차분하고, 평온하고, 긴장을 풀고 있고, 충족감을 느끼는지 생각해 보았다. 내게 하루 중 가장 평화롭다고 느끼는 시간은 모든 일과를 끝내고 일기를 쓸 때, 잠자리에 들어 멍하니 하루를 곱씹을 때였다. 가장 충만함을 느끼게 했던 활동은 운동, 요리, 독서였고 가장 내게 안정감을 주는 것은 씻는 것-샤워와 정리하는 것-청소였다. 반면 나를 고양시키는 것들은 그런 것이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 재미있는 것을 할 때, 맛있는 음식 특히 술, 글쓰기나 심도 있는 회의처럼 극도의 집중력을 모아 몰입해서 하는 일들이다. 


먹으면 소화시켜야 하는 것처럼, 고양시키는 것과 가라앉히는 것을 한 싸이클로 보면 좋을 것 같았다. 이를테면, 치열한 회의가 있었다면 격한 근육 운동으로 푸는 것, 사람들을 만나 여러 감정을 느끼고 돌아왔다면 일기를 쓰면서 정리하는 것, 장시간 몰입하는 업무를 했다면 샤워를 하면서 흐름을 끊는 것 등등. 



3. 나 자신의 일에 몰입하기, 일상 속 멈춤의 시간

생각지도 못하게 발견한 방법도 있었다. 업무 중에 파트너의 부정적인 감정을 감당해야 하는 시기가 있었다. 이미 퇴근한 밤이었다면 일기를 쓰며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겠지만, 아직 한참 업무를 해야 하는 오후였다. 그때 나는 나도 모르게 해당 업무 자체를 덩어리로 떼어 멀리 보내버리고, 사이드 프로젝트 업무를 했다. 다른 사람을 위해 하는 일, 다른 사람의 감정에 휘둘리는 일이 아닌, 나의 성장을 위한 업무에 몰입하자, 감정적으로 나를 괴롭히는 어떤 일은 순식간에 쪼그라들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먼저 나를 위한 일에 몰입할 때 평온이 찾아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회사 업무도 나의 일이지만, 사실상 우리의 일은 다른 사람을 위한 일이기 때문에 돈을 받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돈이 되지 않지만, 내게는 중요한 동시에 업무(즉 돈을 버는 일)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 하나씩은 필요하다는 삶의 지혜를 깨우쳤다. 


일상에서 수시로 멈춤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업무 시간 도중, 명상이 매우 생소하게 느껴지곤 했었는데 어쩌면 이럴 때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건을 겪고, 혹은 어떤 업무를 하고 감정이 반응한다. 그때 잠시 멈추는 것이다. 마치 내 자아가 없는 것처럼, 일들과 감정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누가 옳고 그른가,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잊어버리게 되는 잠깐의 순간이 나를 순식간에 잔잔한 호수로 만들었다. 


<어둠 속의 댄서, Dancer In The Dark> (2001)



3. 치얼스, 치얼스, 치얼스!

<사이드웨이, Sideways> (2005)

이런 시도들은 바쁜 9월에 들어서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8월의 휴가철을 떠나보내면서 모두가 '시작!'하고 스타트를 하는 것만 같았다.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수많은 미팅과 논의, 각종 회의, 자료 만들기 등으로 빼곡한 스케쥴러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네 개의 프로젝트가 동시에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돌아가고 있었고, 외부 미팅뿐만 아니라 사무실에서 하는 업무도 만만치 않았다. 이 모든 프로젝트에 사람들이 모두 얽혀있기에 허투루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격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고양된 감정이 도통 가라앉지를 않았다. 감정만이면 다행일 텐데 가장 치명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피곤한데도 잠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현장에서 육체를 쓰는 업무를 하면, 당시엔 죽을 것 같다가도 후에 기절하듯이 잠들곤 했었다. 그런데 머리로 하는 업무를 오래 하면 머리가 계속 공회전을 하며 멈추지 않았다. 술자리도 이어진 김에, 날씨도 후덥지근하겠다 오랫동안 하지 않았던 퇴근 후 혼술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자면서 휴식을 해야 되는데, 장기가 계속 알코올을 분해하고 있었기에 제대로 잠을 잤을 리 만무하다. 다음 날은 커피를 때려 부어 몸을 일으키고 낮부터 혹은 저녁에 다시 술자리 혹은 혼술이었다. 당연히 몸이 남아날 리가 없었다. 사이드 프로젝트를 할 시간도, 운동할 시간조차 없었다. 주말까지 바빠서 청소조차도 겨우 했다. 이 회사에서 2년 업무 중에 가장 바빴던 달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 주가 되니 어느 정도 업무가 정리되고, 드디어 오늘 일을 오늘 끝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몸을 혹사시키면서 성과는 올렸으니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내 몸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한번 바닥을 치고 나니 다시 튀어 오를 곳이 보인다. 이제부터는 계속 미루어왔던 정신 건강과 내면의 평온을 위한 활동을 시도하고자 굳게 마음먹었다. 



4. 내면의 평온을 위한 도전은 계속된다 

2분기부터 꼭 습관을 들이고 싶었던 것에 명상이 있었다. 계속 미뤄오다가 극단으로 치닫고 나서야 절실함을 깨닫게 된다. 또 조만간 정신과 약을 단약 하게 될 것 같아 최대한 이완하는 활동에 집중하게 되었다. 요가는 움직이는 명상이라 했다. 동시에 몸을 늘리고 편안하게 하는 스트레칭도 병행할 예정이다. 그래서 10월부터 아침저녁으로 요가를 하기로 했다. 의지 만으로는 힘들 것 같아서 요가 클래스를 신청했고, 이러한 활동들은 꾸준히 기록으로 남기며 습관으로 만들고 싶다. 


곧바로 시도한 것은 아로마테라피를 위한 제품을 구매해 마사지를 하는 것이다. 매일 잠들기 전에 오일로 데콜테를 마사지하고, 운동한 날이면 전신을 마사지해주고 있다. 괄사는 집에 구비된 것이 있어 날씨가 좀 쌀쌀해지면 꾸준히 해볼 생각이다. 커피 없으면 못 살고 심지어 얼죽아지만, 저녁에는 따뜻한 물을 마시기로 했다. 기존에 있던 보리차, 캐모마일 외에 추가로 페퍼민트 차를 챙겨두었다. 


몸에 긴장을 푸는 것, 이완시키는 것, 그리고 나라고 명명한 뚜렷한 존재를 내려놓는 것. 이러한 활동이 마치 매일 밤 일기를 쓰는 것처럼 내게 습관이 되고, 일상이 되길 바란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끝나는 삶을 지금 이 순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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