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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 Sep 27. 2022

오늘에 대해서

letter no.5

가을 한낮의 햇살은 너무도 뜨거워 아무 생각 없이 얇은 여름 반팔을 꿰어 입고 출근하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람은 조금 달랐어요. 서늘하고 건조한 바람 한 줄기가 살갗 위를 스치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더군요. 입을 날을 기다리며 서랍 속에 고이 넣어둔 카멜색 캐시미어 카디건이 그리워졌죠. 몹시요. 어느덧 가을이네요.


가을로 접어들면서부터 내년에 지을 농사를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한창 진행 중인 프로젝트들도 작년 이맘때쯤 시작된 것들이니까요. 내년이 되면 제가 굴리는 프로젝트들이 각각 다양한 단계로 움직이게 될 테고 그러면 조금 더 재미있는 일이 많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이렇게 혈기왕성한 제가 있는 반면 하향 곡선을 그리는 특정 '주기'를 발견했습니다. 저는 유독 일이 일단락되고 나면 정서적으로 하향곡선을 그리더군요. 일의 일단락을 목표로 달려가고 그 지점에 골인하면 홀가분함과 뿌듯함도 착실히 느끼는데 말이죠.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요. 달리는 동안에 누적된 피로와 스트레스로 몸이 아우성쳐 댈 테고, 바쁘다가 여유로워지니 정신적으로 시차적응이 필요할 테고, 최우선 순위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니 일이 끝나고 나면 온갖 생각이 다 들기 마련일 테니까요. 물론 일단락된 후의 일에 대한 생각을 포함해서요.


잠깐 슬퍼지기도 했죠. 너무 일을 잘한 나머지 회사에 막대한 돈을 벌어다준 어느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계속 일만 하다가 회사에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온 사장의 아들딸에게까지 부려 먹히게 될 뻔했다고 했어요. 재능 있는  사람의 씁쓸한 이야기는 소주 한잔에 곁들이는 유쾌한 욕지거리 정도의 옛날 일이 되었지만 저는 마냥 웃으면서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쓸모가 몸값이 됩니다. 내 쓸모를 알아봐 주고 그 가치에 부합하는 보상을 받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대로 평생 부려지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두렵기도 했습니다. 평생 누군가의 체스 말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평생까진 아니겠죠. 그러니까 더 정확히 말한다면 '어쩌면 나는 체스를 두는 사람이 될 수 없는 거 아닐까.'


생각이 많아지면 아침 운동을 더 공들여하게 됩니다. 웨이트를 반년 정도 배웠더니 이제 혼자서 무게를 걸고 자극을 느끼며 운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근육을 찢고, 심폐를 괴롭히고, 온몸을 쭉쭉 늘리면서 바닥에 무질서하게 쏟아놓은 레고 블록을 만드는 이미지를, 내일 입을 셔츠를 빳빳하게 다림질하는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그러다 새로운 일이 시작되면 가라앉았던 기분이 다시 정상 궤도로 돌아옵니다. 아드레날린에 너무나도 충실한 몸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이 호르몬이 나를 즐겁게 한다는 것을 부정하긴 어렵습니다. 월요일 아침의 출근길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점점 나아집니다. 월요일 출근길에는 모두 영혼을 빼놓는다고 하지만 저는 오히려 사람들의 얼굴에서 옅은 긴장감을 봅니다. 모두 반듯하게 차려입고, 깔끔하게 정돈된 매무새로 일터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굳은 표정은 일종의 비장미가 있습니다.


이런 때 저런 때가 있지만 사실 어떤 때이든 하루를 행복하게 보내는 방법은 오늘 하루만 생각하는 일입니다. ‘삶은 끝없는 변화의 연속이다.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오늘뿐이다.’ 데일 카네기가 자기 관리론이란 책에서 말했습니다. (책 이름이 본격적인 자기 계발서 같아서 부끄럽지만 저는 이 책을 무척 좋아합니다.)


갖은 방법을 쓰고 환기를 시켜 영혼을 다시 일상을 붙들어 맵니다. 피터팬이 달아나는 그림자를 꿰매듯. 당신이 부디 이런 나를 알아주길 바랍니다.


문득 내가 살아온 증거를 남기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글을 쓰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오늘이 바로 인생이요, 인생 중의 인생이라.

그 짧은 순간에

당신이란 존재의 진실과 실체가,

성장의 축복과

행위의 아름다움과

성취의 영광이 모두 담겨있다.

어제는 꿈일 뿐이고, 내일은 환상에 불과하나

오늘을 잘 살면 어제는 행복한 꿈이 되고

내일은 희망찬 환상이 된다.


- 칼리다사의 , 데일 카네기 <자기 관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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