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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 Sep 14. 2022

해묵은 질문들

work log no.15

여름 내 진행했던 기획은 결국 큰 계약 건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불과 1년 전에 나를 무용하게 만드는 회사를 벗어나 훨훨 날 수 있게끔 해주는 지금 여기까지 와 있다는 것이 감개무량했고 무척 기뻤다. 그런 순간이 있었다.


무언가를 달성할 때마다 가슴속이 찰랑찰랑 뜨끈한 물로 데워지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충족감은 달성 후 다시 시작되는 해결할 일들을 앞에 두고서 순식간에 증발하고 다시 갈증을 일으킨다. 시작과 끝 그리고 끝과 또 다른 시작과 끝. 꼬리를 무는 뱀처럼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반복되는 것이라 여겨 이젠 달성도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묵은 질문들은 달성 후의 여운을 틈타 나에게 슬그머니 다가온다. 나는 무슨 의미일까.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에게 유일했던 진리, 즉 나와 가족이 최대한 행복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진리를 가르치면서 멈추지 않고 글을 썼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오 년쯤 전부터 아주 이상한 일이 내 안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막막한 의혹의 순간이, 삶이 멈춰버린 듯한 순간에 찾아왔고, 그럴 때면 당혹감을 느끼며 근심에 잠겼다. (...) 삶이 멈춰버린 듯한 상태에서는 언제나 똑같은 질문이 솟구쳤다. 무엇 때문에? 이제 앞으로는? (...) 그 질문들은 날이 갈수록 더 자주 되풀이되었고, 점점 더 끈질기게 답을 요구했으며, 답이 없는 그 질문들은 한자리에 계속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내 안에서 뚝뚝 떨어지더니 시꺼먼 얼룩이 되어 버렸다.

- <참회록>,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이런 나의 질문들이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오래 살아온 것도 아니고, 대단한 것을 이룬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그런 생각이냐 싶었다. 생명 현상이 그렇듯 살아 있다면 그것이 끝나는 순간까지 그저 살아갈 뿐이다. 사실 딱히 의미는 없다. 물론 계속 번뇌하겠지. 번뇌하는 건 사람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나무가 되거나 동물이었다면 단순했을 텐데, 그게 아니니까 가능한 매 순간 즐겁게 살자.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 앞서간 사람들과 현재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은 계속 질문을 던져왔고, 던지고 있고, 던질 것이다. 내 존재가, 내 삶이 사실 죽음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의미를 찾게 된다. 아니, 찾을 수밖에 없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하면서 사는 것은 구차하고 괴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아니 두렵고 끔찍한 일일 지도 모른다. 허무하고, 혼돈뿐인 것이 우리 생명의 근간이라는 사실은.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 처방이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내가 그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얻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 

그 좋은 것들, 그 선물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황량함을 노려보게 해 주고, 그것을 더 명료히 보게 해 준 요령을 절대 놓치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톨스토이는 우리 존재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것이 신앙이며 사람은 혼자서 살아가지 못하므로 모든 사람을 위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했고,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저자 룰루 밀러는 삶에 도사린 혼돈이 나쁜 것만은 아니며, 혼돈 속에는 좋은 것들도 있으니 혼돈을 힘껏 끌어안자고 했다. 우연히 만난 책들에서 나의 질문들이 이어진다. 이 점들은 어떤 선이 될 것인가. 이 역시도 허무한 의미부여일까.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며 나 역시도 어떤 결론을 내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하나의 글의 완성, 일단락이 주는 충만함, 안도감을 바라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으로 보인다. 다만 아직 내게는 결론이 없다. 요컨대 이 글은 또 다른 물음표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마른 우물에 빠져 쥐가 갉아먹고 있는 나뭇가지를 잡고 간신히 버티고 있는 나그네는 그 와중에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꿀을 빨고 있다고 했다. 그것이 인간이라고 했다.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결말이란 절멸뿐이라는 것이 지금 살아 숨 쉬고 있는 내 생명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정도일까. 


여전히 나는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갈 뿐이며, 그러다 죽으면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물론 무언가가 더 있을 거라고 막연한 희망 한 줌은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렇기에 때때로 책을 찾아다니고 읽고 고민하고 있는 것이겠지. 내 입장대로라면 사실 어떻게 살아도 상관은 없는 일이다. 되는 대로 살거나 죽음을 선택하거나. 내가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는 죽음을 회피하고 당장의 꿀을 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풍족하고 여유롭게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는 삶을 꿈꾸는 것, 재미있는 것을 만들고 향유하고 싶다는 그런 욕망 같은 것 말이다. 아.. 죽음 만이 답이라고 했던 철학자, 사상가들이 조금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삶을 한 순간 꿈이라고 볼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의미라는 말뚝을 박으며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볼 것인가.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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