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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 Jul 16. 2022

또다시 여름

work log no.13

유월의 막바지에 속초를 다녀왔다. 장마에 바다를 보러 가는 것도 나름의 정취라고 생각해서 일정을 강행했고, 에어비앤비로 바다가 잘 보이는 조용한 해변의 원룸을 얻었다. 날씨는 흐렸고 비도 많이 왔지만 마지막 날엔 맑게 개었다. 이번에도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 것은 어김없이 자연이었다. 이렇게 잔뜩 찌푸린 날도, 안개가 자욱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날도,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마구 쏟아지는 날도, 그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지게 화창한 날도 있는 거라고. 그 모든 날들이 내가 살아가는 날들이었다. 


업무 환경에 변화를 시도하기 위해 속초로 훌쩍 떠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겠다. 이번 이야기는 속초 버스터미널에서부터 시작한다. 만족스럽게 일정을 마치고 나는 간이역처럼 작은 시외버스터미널의 주황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가는 버스는 무려 프리미엄 버스였다. 처음 타보는 프리미엄 버스는 어떨까,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다 등등 잡다한 생각만 하고 있던 내게 회사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대표님이었다.


외부에 있다는 말에 대표님은 좀 길게 말해야 하는 건인데 괜찮냐고 물었다. 버스터미널 안은 텔레비전 소리와 오가는 사람들의 소음, 이따금 들려오는 방송으로 번잡했다. 집에 돌아가서 쉴 생각만 하고 있던 몸이 최상의 컨디션이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그런 것쯤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 어떤 곳에 있더라도 일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자유롭게 일하려면 언제든 일상에 업무를 끼어넣을 수 있는 탄력성이 필수다.


비우고 정리하는 작업을 끝내고 흐물흐물해진 나를 단단하게 만들고 났더니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곧장 일이 떨어졌다. 그것도 그냥 일이 아니라 '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머릿속에 캘린더와 해야 할 일의 핵심과 순서가 청사진처럼 촤르륵 펼쳐졌다. 유유자적 돌던 피가 한꺼번에 뇌로 바짝 몰릴 때 느껴지는 짜릿함. 아 역시 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로구나. 새삼 깨달았다. 물론 문제가 너무 어려우면 '내 소관이 아니네~'라며 몸을 빼지만 적당히 도전적이라면 어떻게 요리할지 궁리하는 순간과 긴장감을 즐기고 있었다.


내가 해야  일은 글로벌 대기업들과 우리 회사  3사가 협업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해당 회사의 중역 앞에서 피칭하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일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보통 이런 사업적인 논의는 일견  이루어질 것처럼 화려해 보이지만 허상일 경우가 많고, 피디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지거나 직접적인 이득이 생기는 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내게는 흥미로운 일이었다. 글로벌 사업판 안으로 들어가서 역할을 해보는 것도,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만에 하나   사업으로 엮이게 되면  많은 회들이 생기는 것도 모두 구미를 당기게 했다. 물론 이직하면서 회사에 기대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혼자서는   없는 세상을 보고, 내가 생각하는 이상의 스케일을 상상할  있게 되는 .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미팅과 피칭을 무사히 마친 후 3사는 일을 함께 해보는 것을 전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숨 돌렸다고 생각했던 내게는 또 다른 기획 미션이 주어졌다. 다만 이번 미션의 경우는 함께 일할 동료가 생겼다. 그녀는 나와 나이와 경력에 10년의 갭이 있는 다른 팀의 막내 피디였고 현재 촬영 중인 작품의 스케줄로 한창 바쁜 상황이었다. 데드라인에 맞추기 위해서는 어쩌면 나 혼자 하는 것이 빠르고 편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내가 일을 다 도맡아서 할 수는 없었다. 슬슬 관리자로써 전체를 보고 프로젝트를 운용하는 역량을 깨우쳐 가야 할 때였다. 정식 팀이 아니라 일종의 TF이므로 어쩌면 더 좋은 기회일지도 몰랐다. 어떻게 하면 각각 어떤 능력치를 가진 두 사람이 함께 이 미션을 해결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다 보니 이 또한 내게는 즐거운 일이었다. 게임은 어려워야 재미있다.


22년도의 거의 반절을 쏟아부은 프로젝트도 드디어, 마침내, 굴러가기 시작했다. 기획안이 나온 후 5개월 만에 기획적인 부분을 재개해야 했던 터라 텐션을 끌어올리는 일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날을 잡아 정리해보니 이미 준비는 다 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초에 생각했던 기획 포인트가 분명했고 작가와 함께 발전시켜나가야 할 부분에 대한 고민도 모두 꺼내놓은 상황이었다. 오로지 다시 집중하는 마음의 문제였다. 일이라는 것은 잠깐잠깐 쉬더라도 바짝 집중해서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 흐름과 긴장이 중요하다.  흐름이 끊기고 긴장이 흐트러지면 일단 하기가 싫어진다. 가장 큰 문제는 샘솟던 창조의 활기가 달아나 버린다는 사실. 진행하는 모든 프로젝트는 매주 페이퍼가 나오고 매주 회의가 진행된다. 피디들 뿐만 아니라 크리에이터들도 적극 동조하고 있어 매우 고무적이다.


달리기를 하다 보면 점점 더 빨리, 더 멀리, 더 오래 뛰고 싶어 진다. 심장이 벅차오른다. 그것은 어쩌면 러너스 하이였을 지도 모르겠다. 내게 여름도 그렇다. 덥고, 지치고, 해가 길어 불면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욱더 내달린다.


여름은 내게 항상 뜨겁다. 많은 일들이 모두 여름에 일어났다.

다시 맞이한 여름이 너무 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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