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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 Jun 21. 2022

약한만큼 강해지는 거야

work log no.12

스스로 취약함을 느껴야만 비로소 강해질 수 있다. 어느 날 새벽부터 아침까지 두어 번 잠에서 깼다 잠이 들었다를 반복하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겨우 잡아끌어 일으켜 세우자 싫은 감각을 느꼈다. 뇌가 흐물흐물한 젤리가 된 것 같았다. 아니 뇌뿐만일까.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 육체와 정신이 모두 끈적끈적한 낯선 물성으로 바뀌어 버린 것 같았다.


최근에 민감하게 다루어야 할 일, 판단하고 결론을 내려야 할 일, 중간에서 정리하고 전달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새로 만나게 된 사람들은 물론 원래 알던 사람들과 연락하고, 만나고, 논의하는 일이 연이어 이어졌다. 이때까지의 나를 넘어서는 결정을 해서 나조차도 내가 낯설었던 순간도 있었다. 사건과 이벤트, 사람들 덕분에 무척 활발하고 반짝이는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무척 어수선했다. 나의 감정은 물론 다른 사람의 강렬한 감정들도 전이되어 내 안에 넘실거렸다. 


나의 일이란 앞으로 이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덜하진 않을 거다. 외적으로도 거미줄처럼 뻗치고 내적으로도 깊이 파고들어야 하는 일. 사람 관계도, 작품도. 힘에 부쳐서 괴롭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내가 확장된 만큼의 일들이 따라오기 마련이니까. 오히려 내 고질적인 문제였던 완벽주의 성향을 무너뜨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수많은 일정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모든 것을 다 완벽하게 챙기는 것은 불가능의 영역이다. 자연스럽게 하나둘씩 놓치는 일이 생겼다. 그러나 이젠 조금 놓치더라도 안심할 수 있게 되었다. 혼자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부족한 부분, 다른 사람이 놓친 부분을 서로 채우면 된다. 이전보다 더 사람을 믿고 의지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과거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애썼던 부분이 큰 그림에서 보면 그렇게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는 것도 이제는 알게 되었고. 


다만 매일 아침 머릿속이 안개에 뒤덮인 것처럼 뿌연 느낌이었다. 뭔가 더 이상 머리를 쓰는 일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물렁물렁 하다 못해 다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나 자신이 녹아서 없어질 것 같은 취약함에 시달릴 때 다시 나를 단단히 굳히기 위해 필사적이게 된다. 흩어지지 않고 하나로 모으는 것. 내가 다시 집중과 몰입을 할 수 있도록. 우선 내 안에서 와글와글 대는 생각과 기억들을 비워야 했고, 비우는 와중에 자극들이 계속 들어오지 않게 뚜껑을 닫아야 했다. 길게 이어져 온 일의 여정을 잠시 멈추고, 반복되는 지겨운 내 일상의 모든 것들을 낯설게 보는 이방인이 되어야 했다. 장마가 성큼 다가왔지만 멀리 떠나는 교통편과 숙소를 예약했다. 고백하자면 이 글을 쓰면서 결심이 섰다. 


자신이 원래 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때, 그리고 자신이 취약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어야만 강해질 수 있다. 강해진다는 것은 무엇이든 싸워 이길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단단해지는 것이다. 약한 나를 알아야 끓다가 증발해버리기 전에 다시 온도를 맞추어 단단한 물성으로 돌아올 수 있다. 언제고 단단할 수 없다. 단단했다 물렀다가 다시 단단하게 만들었다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약한만큼 나는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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