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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 May 10. 2022

일을 사랑하는 행운아

work log no.10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풀꽃 1> 나태주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영화계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대학에서 배웠던 '예술'로써의 영화를 모조리 지웠다. 내 모든 감각의 안테나는 새로 배우는 '상업 영화'를 향해 있었다. 운이 좋았던 것은 업계 안에서 다양한 직종을 마구잡이로 구르면서 배우지 않고, 처음부터 '기획과 기획 프로듀서'의 일을 하며 배웠던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이콘셉트 기획 영화의 구조를 제대로 배우고 훈련한다면 누구나 좋은 기획 프로듀서가 될 수 있다는 당시 팀장님의 가르침을 배웠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범한 재능이 없더라도, 배우고 훈련하면 할 수 있다는 말은 대학 시절 내내 고작 몇십만 원으로 다급하게 찍은 작품에 대한 신랄한 평가가 고통스러웠던 내게 제법 고무적이었다.


그 때로부터 약 10년이 흘렀고 나는 그때부터 쭉 기획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다. 초년생일 때는 외부에서나 프로듀서로 불렸지 사실상 시니어 프로듀서들을 보조하여 진행하는 일을 했고 내 이름을 제대로 올린 작품은 작년에 개봉한 영화가 처음이다. 그리고 나는 꽤나 나의 일을 사랑하고 있다.


내 삶에 우선순위를 정리하면 가장 꼭대기에 있는 것은 '나의 일'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 프로듀서라는 직업 자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내가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일'이라는 가치관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프로듀서가 아니라 국수 장수라면 맛있는 국수를 만드는 일이 내게는 가장 중요하다. 매일매일 면을 삶는 일이 지겨울지언정 맛있는 국수를 팔면 내가 먹고 살 돈을 벌고,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행복하고, 신 메뉴를 궁리하며 재미를 느낄 것이다.


처음부터 이 일을 좋아하진 않았다. 다만 누구나 배우고 훈련하면 할 수 있다는 말에 자극을 받아 진지하게 임할수록, 알면 알 수록 재미있었다. 좋아하는 것보다 잘한다는 말을 먼저 들었다. 좋아하는 일을 파고들면 잘하는 일이 되기도 하지만, 잘하는 일이 좋아하는 일이도 되기도 한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이유는 내가 잘하는 것이 어떤 '가치'가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치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자체이기도 하고, 돈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어떤 가치를 창출했다는 사실이 굳건한 자존감의 원천이 된다. 이런대도 일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그렇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삶의 최우선 순위에 놓고 진지하게 임하고 있으니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기본으로 깔려있기 때문이다. 기획일은 비용을 많이 쓰는 일이고 그 비용은 회사에서 대고 있으니 회사에 빚을 낸 사람인 나는 응당 끊임없이 챌린지를 받고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잘 나가는 사람과 잘 안 되는 사람 즉 빛과 어둠이 아주 짙은 업계이기에 경쟁에 노출되어 있고 나도 모르게 치밀어 오르는 질투심에 평정을 유지하는 것 역시 꽤나 혹독한 일이다.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일이므로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부지기수고 소통에 골머리를 앓기도 한다.  


불과 얼마 전에 또 한 번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쩌면 이 일이 내게 맞지 않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 한번씩 앓는 감기처럼 찾아오는 생각이라 더 깊게 이어지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생각에서 아주 수월하게 벗어날 수 있게 해 준 것은 나도 모르게 어느새 듬직하게 성장한 또 다른 나였다.


아직 내가 이 일이 맞는지 아닌지 논할 단계가 아니다. 일의 정점까지 가보지도 않고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된다. 정점에 이르러 보고서도 역시 나는 이 일이랑 맞지 않다고 결론이 날 수도 있지만 천직이라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 기왕 약 10년의 시간 동안 이 바닥에 있었다면, 어느 정도 인정받았고 전도유망하다고 평가되고 있다면 정점에 닿을 때까지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 일로 얻는 과실까지 제대로 맛보고서 그 맛이 어떤지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이 돈을 버는 일을 좋아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싶은 사람이고, 좋아하는 일을 잘하고 싶은 사람이며, 일을 할 때 행복한 사람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나의 일이 그랬다. 처음에도, 몇 년쯤 지났을 때도, 다른 일을 하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도 다 알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알겠다. 내게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지.


지금은 프로듀서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있지만 언젠가 제2의, 제3의 일들이 생기고 나의 직업은 프로듀서 겸 제2의, 제3의 직업이 될 것이다. 그 일도 내가 좋아하는 것에서 비롯할 테고 나를 먹여 살리는 동시에 내가 세상에 쓰이는 기쁨을 누리게 하는 일임에 분명하다.


나는 행운아다. 내 일을 지독히도 사랑하는 행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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