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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 Aug 08. 2024

난세의 영웅

4. 옳은 자리에서 빛나는 가치


1. '듣는 것'의 위대함


한 해의 절반을 넘어 달려가기 시작하는 7월은 유독 뜨겁고, 축축 처지는 달이다. 특히 생일 주간에 빼곡히 잡힌 약속을 마무리하고 붕 뜬 기분이 가라앉기 시작하면 체력이 끝도 없이 아래로 곤두박질치곤 한다. 이례적으로 올해는 7월에 여름휴가 일정을 잡았고 덕분에 유독 힘든 7월의 날들을 가장 중요한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분할 수 있었다. 


휴가를 떠나기 전에 K감독에게 연락했다. 사람 공부를 하다 보니 그가 몹시도 그리워졌다. 그와 만난 지도 꽤 오래되었다. 그렇지만 아직 제대로 함께할 만한 작품을 찾지 못했다. 여러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서로에 대한 마음과 별개로 이런저런 이유로 성사되지 않았다.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는 순수하게 서로 함께 하고 싶은 가능성 만으로 관계를 유지해 왔지만, 올해에 이르러서 다시 만난 우리는 각자의 영역에서 많은 부분 소진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나의 역할이라는 것은 늘 가능성을 제시하는 일이었다. 


"감독님, 여기저기서 해달라는 거 이제 다 맞추지 마. 그냥 감독님이 제일 잘하는 걸 해. 이제 우리는 그냥 하면 안 돼. 잘하는 걸로 제대로 해야 해. 감독님이 진짜 잘할 수 있는 걸 제대로 보여줘 봐요."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던 K감독은 제대로 허리를 피고 앉았다. 그의 눈빛은 날카롭게 벼려진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진짜 제대로 해볼게요. 제대로 찐득한 걸로."


휴가를 다녀와서는 보따리장수처럼 내가 맡은 프로젝트의 다양한 아젠다들을 싸들고, 레이블 담당자를 만나러 갔다. 사실 그녀에게 먼저 듣고 싶었던 것은 그 어떤 프로젝트의 그 어떤 아젠다보다 2년을 넘게 고군분투한 나의 아픈 손가락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녀는 새로운 컨셉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 소재는 참 어려운 것 같아요. 그렇지만.. 이런 컨셉의 작품이 ott에 뜬다면 

저는 관심이 없는 소재라도 한 번은 눌러보고 싶게 만드는 컨셉이라고 생각했어요."


2년 넘게 작업한 대본을 원점은커녕 아예 새로운 한 줄의 컨셉으로 리부트 한 작품을 이 단계에서 그녀가 봐줄 이유는 사실 없었다. 담당자로서 무심코 보인 작은 호의였건, 나에 대한 일말의 호감이었든, 그녀는 중요한 순간마다 결정적인 말을 해주곤 했다. "팀장님.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라 팀장님의 것을 하셔야죠!" 술자리에서 잠시 스치듯 마주쳤을 때 그녀가 장난스럽게 던진 그 한 마디가 나를 몇 번이고 건져 올렸다는 것을 아마 그녀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리라. 


그렇게 나는 인간에 대해 곱씹어 보게 되었다. 인간 人間 '사람 인'은 서로가 기대고 있는 모습, '사이 간'은 우리가 머무는 시간과 공간이 다른 존재라는 '해 일'의 부수의 의미에 대해 7월에 공부한 바 있다. 서로 다른 우리의 시간과 공간이 조우하는 순간이 있다면, 분명 조우 직전에는 분명 서로의 존재를 듣는 것이 선행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진공의 우주, 외로운 망망대해의 섬이자 가련하고 박약한 우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라도 나의 교신을 들을 수 있는 누군가에 의해 구원받는다. 가능성은 거기에서 시작되고, 일단 시작하는 순간 에너지는 폭발적으로 팽창한다. 우리는 계속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길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2. 돌고 돌아 결국에는 '가치'


7월 데스커 라운지의 프로젝트 R 최원석 대표와의 워크 투게더를 다녀왔다. 무엇이 사람들의 발걸음을 그곳으로 향하게 했는가가 무척 궁금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간 프로젝트 R와 최원석 대표를 잘 알지도 못했고, 팝업을 즐겨오거나 관심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팝업이 한창 화제가 되었을 때도 나와 별개인 현상으로만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은, 코로나 이후 북미의 극장은 코로나 이전의 관객을 거의 회복했으나 한국은 좀처럼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원인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하면서였다.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제작자 입장에서는 컨텐츠 자체와 컨텐츠가 상영되는 공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변했다는 것이 가장 치명적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영화관의 경쟁상대는 '카페'였다. 영화와 카페 모두 시간재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영화관과 팝업, 전시와 같은 새로운 공간은 시간재이면서 경험재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차이점은 극명하다. 이러한 오프라인의 경험형 공간은 영화나 드라마와 같이 스토리를 '주입'하기보다는,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들의 메시지는 심플하고 직관적이므로 흡인력이 강하다. 물론 인증하여 전시하기도 좋다. 


변해가는 시대의 사람들의 욕망을 최전선에서 읽어내는 최원석 대표의 이야기와 Q&A는 인사이트가 가득했다. 그중에서 내게 가장 크게 다가왔던 것은 결국 ‘가치’의 중요성이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내가 제공하는 것이 가치 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고객에게 어떤 가치를 줄 것인가? 고객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질 것인가? 
고객은 '좋아요'라는 단어 1개 만을 가지고 있다. 고객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치를 만들어야만 한다.


가치에 대해 곱씹다 보니 코로나 시대에 발간된 <영화는 무엇이 될 것인가>에 실린 주진숙 교수님의 글이 떠올랐다. 

이제는 극장의 커다란 스크린에 펼쳐지는 이미지에 매혹당하지 않으며 더 이상 가슴이 설레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영화가 영화적인 것을 이제 다 소진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영화는 100여 년간 끊임없이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고 재해석하며 우리를 매혹해 왔다. 이제 그 언어들은 더 이상 새로움을 찾지 못하고 클리셰로 떠돌고 있으며, 발맞추어 미학을 발전시켜 온 기술은 이제 영화를 종속시키고, 이야기와 기교는 복제에 복제를 거듭할 뿐이다. 극장이 서서히 사라지려 하는 것은 바이러스 때문이기보다는 '영화적인 것'의 소진 때문이 아닐까.

<영화는 무엇이 될 것인가> - 주진숙


우리는 어떤 가치를 전할 것인가. 어떤 가치를 경험을 하게 할 것인가. 고객에게 전할 가치를 만들어 투자사에게 우리가 생각한 ‘가치’를 증명해 낼 수만 있다면. 이 불황의 고리가 끊기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우리가 바라는 다양성의 시대가 오지 않을까. 왜 민희진이 뉴진스를 성공시켰나를 생각해 보면 핵심은 팬심을 잘 안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돌의 팬이 되는 사람들의 욕망을 움직이는 독보적인 감각은 물론 팬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빠르게 캐치해 기민하게 소통했던 것이다.


신진 감독들과 사적인 술자리에서 한 감독이 말했다. 그는 한때 찬란했던 홍콩영화가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한국영화가 침몰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정말 크게 공감했다. 세대교체 없이 반복되는 배우들, 성공한 작품의 답습, 고민 없는 패키징, 아류작의 아류작. 열화 되어 닳아빠진 영화는 철저하게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게 되며 마지막에는 산업의 종말로 향한다. 이미 사람들의 인식은 바뀌었다. 사람들은 냉담하게 말한다. 왜 우리가 재미가 없는 한국영화를 봐줘야 하고, 한국영화를 지켜야 하는 거냐고.


다시 가치에 집중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돈, 시간, 관심을 기꺼이 쏟을 만한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진짜'를 만들어 내야만 한다. 


최원석 대표와 워크 투게더는 내가 찾고 있었던 해결책이 결국 ‘가치'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물론 그 가치가 무엇이 될 것인지 우리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소통하고, 구체화해야 할 것이다.


오랫동안 고민해 왔던 카메라를 결국 구매했다. 말, 글과 함께 또 다른 나의 무기가 될 것은 영상과 이미지다. 글과 스토리가 중심이었지만, 전공은 영상과 연출이므로 이를 적극 활용하여 나라는 사람 자체도 메시지를 발신하는 미디어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3. 옳은 자리를 찾기 위한 성장통


사람에 대해 공부하며 바로 실천했던 것은 사람의 재질을 파악하고, 그 재질에 맞는 자리에 두는 것이었다. 그간 옳은 자리에 여러 방향의 혼선이 존재했다. 내가 사람의 재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때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그 사람이 스스로의 재질을 파악하지 못했을 때도 문제가 생겼다. 


옳지 않은 자리에 사람을 두면 그는 처음부터 나를 원망하고 불만을 토로했다. 자신의 재질과 맞지 않는 자리에 있고자 하는 사람은 계속 욕을 먹고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일단 제자리를 찾는 순간 그 사람은 의욕에 넘쳐 스스로 일하며, 성과를 보이고, 얼굴과 인상까지 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서로가 서로의 지옥이 될 뻔했으나, 옳은 자리를 찾는 순간 그들은 먼저 웃으며 다가와 나에게 감사를 전했다. 


예전부터 나의 일을 대할 때 ‘인사가 만사'라고 정의를 내렸지만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 스스로가 인사에 대한 영향력이나 결정권을 행사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일의 핵심에 있는 중요한 결정을 항상 다른 누군가에게 넘겨주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름대로의 이유들이 있었다. 회사의 월급을 받고 있으니까, 그것이 나의 쓸모였으니까, 결국은 중요한 결정을 내린 그가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을 커버해 줄 테니까. 그래서 누군가에게 나는 없어선 안 되는 핵심 기획 인력이었고, 누군가에게 나는 맡긴 일만 처리하는 열정도 영혼도 없는 바보였다. 


아프게 깨달았다. 벽에 가로막혀 방향을 잃은 막막한 상황으로 몰고 간 것은 이 세상, 다른 어떤 누구들이기도 하지만, 나 자신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세상을 향해 뚫고 갈 수 있는 힘은 결국 내 안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었음을.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깨달음은 나에게 기회를 주고, 이끌어주던 사람을 잃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자전거를 배울 때 결국은 잡아주는 두 손을 놓아야만 타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듯이. 모든 영웅서사에 영웅은 멘토를 만나지만 필히 그를 잃어야만 성장하듯이. 


이미 늦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맡은 프로젝트를 다시 재배치하여 옳은 자리를 찾는 작업을 마지막까지 해보기로 했고, 진행하고 있다. 업계 선배들은 괜한 일에 힘을 빼지 말라고 했지만 내겐 괜한 일이 아니라 너무 중요한 일이었다.


이 작품은 누구에게 사랑을 받을 것인가? 어떤 사람에게 재미를 줄 것인가? 위로를 줄 것인가? 쏟아지는 컨텐츠 사이에서 어떤 독보적인 가치가 있을 것인가? 컨셉을 재정비하고, 주변의 사람을 들볶아 데이터를 모으고, 맞지 않는 사람은 정리하고, 옳은 사람에게 제안을 시작했다. 궁여지책이 아닐까 회의가 드는 순간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점점 좋은 아이디어라고 말하며, 할 수 있는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물론 성과로서 증명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제야 홀로 서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갓 태어난 밤비처럼 미친 듯이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선 것이나 다름없지만.



4. 세상에 내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것


여름휴가를 다녀온 후부터 야외 러닝을 시작했다. 찜통더위 속에 한번 달려보고서 왜 스터디를 함께 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한결같이 ‘달리라'라고 했는지 알게 되었다. 러닝을 마치면 나는 항상 마음속으로 외친다. 기획으로 내 이름 석자 올린 작품을 흥행시키겠다고. 혹은 그렇게 하게 해달라고. 이전에는 작품이 세상에 나가기 만을 바랐다면 뛰기 시작하면서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냥 세상으로 나가서는 안된다, 무조건 성공시킬 거라고 그렇게 외치게 되었다. 미치기 일보직전이라도 달리기를 하면 살 것 같았다. 달디 단 고양감은 무엇이라도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를 주었다. 


이렇게 매일 자신감을 충전하며, 제안 미팅을 앞두고 스토리젠터 채자영님의 강의를 듣고 있다. 강의에서 ‘프레젠테이션은 세상에 내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행위'라는 문장을 수집했다. 


누가 나를 알아봐 줄까? 내가 가진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업계는 바뀔 수 있을까? 우리가 과연 바꿀 수 있을까? 이와 같은 고민들을 하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 암담함을 느껴왔다. 이제야 그 답을 찾은 것 같다. 결론은 아무도 이를 해결해 줄 수 없다. 누군가 오즈의 마법사처럼 짜잔 하고 나타나서 모든 일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내가 마법사가 되는 수밖에 없다. 내가 나의 소원을 들어주는 마법사가 되어 스스로를 도와야 하고, 내가 누군가의 오즈의 마법사가 되어야만 한다. 물론 그처럼 전능하지는 않겠지만 나의 정체성을 스스로 정의하고, 내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세상에 표현하고, 지치지 않고 나를 증명해 내는 여정으로 향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만 불황의 연쇄 고리를 끊고 다시금 가치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내가 작업한 작품 하나 세상에 내보내는 것만을 간절히 원했던 나는 이제 내가 업계를 바꿔나가는 주역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난세에 영웅들이 나타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옳은 사람을 옳은 자리에 두고, 존재할 이유가 있는 가치 있는 작품을 만든다면? 우리가 서로를 알아봐 주고, 우리가 믿는 것을 표현하고 증명해 나간다면? 언젠가 분명히 기회는 올 것이라 믿는다. 그리하여 내가 사랑하는 영화가 오래오래 사람들의 곁에 있길 바란다. 


이제 영화는 스스로에게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것을 질문해야 한다.
-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


극장은 여전히 사람들의 곁에 있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은막의 삶에 이입하는 경험을 줄 것이며, 스펙터클에 도취되게 할 것이며, 가장 내밀한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보고 울게 할 것이다. 깨어 있고 싶을 때도 있지만, 꿈을 꾸고 싶을 때도 있다. 마치 고대의 ‘제의(提議)'처럼 기원과 정화의 일종이자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던 가장 필요한 위로가 될 것이다. 




커버 사진 <첩혈쌍웅>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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