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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터졌다 Jan 17. 2024

책 한 권. 종이 한 장.

행복도 요구해야 옵니다. 

어려서부터 이상한 습관이 하나 있다. 공책을 새로 사면 아무 데나 펼쳐 손으로 만져보고 볼에 대기도 한다. 

새것이 주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부드럽고 미백색으로 빛나는 종이의 질감을 만끽하는 게 큰 즐거움이었다. 가난은 어느 정도 상대적인 것이라 가난해서 비참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형제들 중에는 내가 제일 빈곤하게 자랐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고등학교 3년 내내 떠오르는 겨울 점퍼가 단 하나뿐이다. 그것도 좀 두툼한 가을 점퍼 수준의 옷이었다. 나는 그때 이미 "요구"라는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내 기억에 바지 좀 사줘. 점퍼 좀 사줘 소리를 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어쩌다 새 공책이나 새 책을 갖게 되면 아무도 넘기지 않은 그 새것의 느낌이 굉장히 황홀했다. 그것이 휘발되기 전에 오로지 느끼고 싶었다. 어느 정도 집착을 했는지 고백하고 싶다.  고등학교 한문 선생님께서 글씨를 매우 잘 쓰셨는데 궁서 흘림체로 아이들 상장에 반 번호와 이름을 직접 작성하신 것을 기름종이로 본떠 혼자 연습해서 노트에 옮겨 적을 정도였다. 

미백색의 새 종이에 찌꺼기가 안 나오는 날렵한 볼펜으로 궁서 흘림체 글씨 쓰기는 나만의 쾌락이었다. 

이제는 원하면 언제든지 새 종이를 살 수 있고 몇 천 원에 새하얀 A4용지가 수십 장이지만 아직도 첫사랑의 목덜미를 바라보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설렌다. 







새 종이 한 장을 사랑하여 그에 걸맞은 글씨체를 연습하였다. 천 원짜리 볼펜이라도 정갈하게 자세를 바로 하고 좋은 시와 훌륭한 명언을 적어두었다. 많은 것을 갖지 못한 나의 결핍이 종이 한 장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져 나로 하여 그 사랑에 걸맞은 품위와 태도를 갖추게 해 준 셈이다. 

어제 근처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신간 시리즈를 발견하여 모두 대출해 왔다. 아직 아무도 넘겨보지 못한 그 새 책들을 나는 또 얼마나 만지고 넘겨볼까. 내가 선택한 행복이다. 힘들었던 지난 세월을 돌이켜볼 때 힘들고 불행했던 순간 나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아닌 줄 알면서도 끊어내지 못한 관계들. 

끌려가는 줄 알면서도 차마 거절하지 못한 불쾌한 호의들. 

이마저도 없으면 어쩌나 싶어 선택한 불필요한 물건들. 


모두 나는 없었다. 


어쩌면 어떤 이는 한 두 줄 끄적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구겨버릴 수 있는 새 종이 한 장을 나는 매우 사랑하였다. 나의 사랑이 글씨체를 불러오고 그것이 아름다운 기록을 남겼다. 

내 손에 들린 지금의 불행 앞에 당당하지 못한 이유는. 어쩌면 이것들이 모두 내가 초대한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 때문이다. 내가 없는, 무시해도 좋을 이유로 쉽게 선택한 종이 한 장의 불행이 이다지도 두껍고 견고한 책이 되어 나를 짓누르는 것인가 비로소 의심해 본다. 


가벼운 종이 한 장의 불행을 변명하려 페이지가 늘어나고 그에 걸맞은 신세한탄을 하면서 책이 되고 소설이 되어 불쾌하게 서사가 진행되어 갔다. 불행의 새 페이지는 넘기면 넘길수록 종이에 묻은 독으로 나를 중독시켜 버렸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가고 종이를 넘기는 손을 멈춰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언가에 홀린 듯 그 두꺼운 책을 멈추지 못하고 넘기고 있다. 입술로는 계속 '거기 아무도 없어요? 누가 내 손을 좀 잡아줘요.'라고 달싹거리고 있다. 요구할 줄 모르던 작은 소녀는 나이가 들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면 요구하기보다 스스로 손을 멈추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불행의 페이지를 계속 넘기는 자신의 손을 스스로 멈추고 일어나 내가 좋아하는 새 종이에 다시 아름다운 무언가를 써 내려갈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수백 장의 불행을 넘기는 것은 중독으로 삶이 망가질 테지만 새 종이 한 장에 새긴 행복은 스스로 고귀하게 살게 해 줄것이다. 


나는 이제 어떤 책을 쓸까.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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