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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원재 Jul 17. 2021

환경이 만드는 사람, 사람이 만드는 환경

지속가능한 문화도시로의 가치

  지금보다 좀 더 어렸을때는 함께 놀고 싶은 친구들을 선택하며 살았던 것 같다.

대학 시절, 크게 의도하지 않았지만 조금은 편해보일 듯한 페이스를 가진 친구들, 크게 부딪히지 않아도 될 것같은 성품의 친구들을 골라가며 관계들을 만들어가다보니 나도 모르는 선입견이라는 것이 생겼던 것 같다.

  소위 까칠하거나, 인상이 나쁘거나 한 이들을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게 되었고, 그로인해 주변에는 흔히 이야기하는 평범한 친구들, 잘나가는 친구들 정도가 남아있었다.


  지금와서 스스로를 돌아보자면, 그 시절보다 더 어렸을 때, 나 또한 참 까칠한 사람이고, 인상이 나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아니 정확히는 회심이라는 표현이 더 맞겠다.) 내 성품에 있어서는 많은 변화가 왔고,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시기부터 내 선입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지, 그것으로 인해 놓친 관계들이 얼마나 많았었는지 알게 되었다.


  동물들의 경우, 스스로를 보호하는 수단으로 색깔을 바꾸고, 몸을 부풀리고, 가시를 세우는 방식을 택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사람 역시, 늘 경계심이 많은 이들이 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더 자극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먼저 타인을 비방하고, 말을 옮기고, 색깔을 바꾼다.

  이것은 그들의 잘못일까, 그들이 그렇게 밖에 행동할 수 밖에 없도록 내모는 환경의 탓일까? 마치, 달걀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를 논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사람의 관계과 일상은 복잡하다.


  최근 한두주간 그동안 못봤던 영화와 드라마 몰아보기를 했다. 어차피 극장을 가거나 하는 일들도 당분간은 접어야할 듯하고, 메말라가는 감성과 지성, 간접경험을 계속 미룰 수만은 없기에 짬만나면 열심히 시청했다.

  다양한 스토리와 전개들이 있었지만, 모든 콘텐츠들을 접하면서 자꾸만 보이는 것들이 환경에 지배당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을 하게 되고, 그 선택으로 누군가는 악마가, 누군가는 영웅이되어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동안 어찌되었든, 이 수많은 선택 속에서 환경에 지배를 받거나, 환경을 만들어가거나 해야한다. 그렇게 관계하고, 살아간다.

결국, 이 선택이 갈등을 불러일으킬때도, 갈등을 조절할때도 있는 것이다.


오랜 시간 지역에서 어쩌면 참 광범위한 ‘문화’라는 카테고리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해보면서 최근까지 고민의 핵심이 바로 이 지점이다. 현실이 바뀌거나 조정되기는 쉽지가 않다.

그러면서 부르짖는 ‘존버’도 가만히 버티기만 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나의 ‘존버’가 의미가 있어지려면 지금의 ‘액션’이 중요하다.

굳이 무언가를 선택해야하는 상황이라면 만들어진 환경보다는 만들어가는 환경을 택하는 일을 하는 것을 선택하고 싶다. 하지만 그 일들에 시간적 제한을 두고 싶지는 않다. 항상 그 정해진 시간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 여유롭게 기다릴 수 있는 것이 내공이다. 방향을 잃지 않는 것이 내공이다.


문화도시가 되고, 이제 문화도시로서 면모를 갖추는 것은 5년짜리 사업에 메여 그 시간 안에 어떤 결론을 내기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그 시간동안 지속가능한 ‘버팀’의 능력, 함께 버틸 수 있는 멤버를 만들어가는 일이고, 아무리 바람과 태풍이 불고 외압이 들어와도 방향을 잃지 않는 힘을 기르는 일이다.

5년내에 우리가 이러한 내공을 가질 수 있다면 오랜 시간 꿈꾸던 지속가능한 문화도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기대해본다.


무언가 완성을 위해 에너지를 집중하는 것보다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에 대한 것에 대한 에너지를 모으는 일이, 살기 좋은 도시보다는 살고 싶은 도시가 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한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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