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아닌 허구 세계에 젖어 사는 요즘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기 위해 수목을 기다리며 일주일을 살아낸다는 뜻이다. 그중에서 내가 유난히 꽂혀 있는 포인트는 주인공 우영우의 우당탕탕 성장 스토리일 것 같으나, 실은 영우와 준호의 들꽃 같은 로맨스다.
드라마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찾아온다. 가장 애정하는 순간이. 덕후들은 그것을 ‘치인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비장애인에게 아무렇지 않게 쓰이는 ‘치인다’는 표현은 누군가에겐 폭력적인 표현이 될 수 있다. 바로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지닌 영우에게 그렇다.
우연히 끔찍한 교통사고를 정면으로 목격하게 된 영우는 감각 과부하 상태에 빠져 자해를 하는 등 패닉 상태에 빠진다. 그러자 준호가 다가와 영우를 있는 힘껏 안아준다. 서툴게나마 영우를 위해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 대해 공부했던 준호는 자폐인인 영우가 감각 과부하 상태에 빠졌을 때 압력을 가해주면 불안감이 완화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우가 패닉 상태에 빠져 준호 자신도 놀라고 당황하였지만, 어서 영우의 패닉 상태가 멎길 바라는 간절함이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사랑할 결심을 마친 그의 사랑은 깊고 단단했다.
비장애인에 비해 촉각과 청각이 발달하여 패닉 상태에 취약한 영우에게, 준호는 영우만의 전용 포옹 의자가 되어 주겠다고 말한다. 난 이 대사만큼 사랑의 깊이와 모양을 내보이는 대사가 없다고 생각했다. 자폐가 있는 영우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삶에 맞춰가겠다는 고백이 아닌가.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 난폭한 키스도, 마냥 달콤하기만 한 이벤트도 아닌, 당신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맞춰가겠다는 담백한 고백만큼 진정성 있는 고백이 또 있을까.
나는 심한 생리통으로 응급실에 실려간 적이 있다. 지독한 통증에 시달리며 유일하게 내 곁에 있는 사람, 애인에게 살려달라는 말을 했었다. 그 정도의 응석은 부려도 될 것 같았다. 애인은 그 순간에도 침착하게 119를 부르고 내 손을 꼭 잡은 채 나를 안심시켜주는 사람이었으니 나는 내가 아픈 것만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다행히 생리통 진통제를 먹으면서 지독한 통증은 멎었고 아무 이상 없다는 검사 결과를 받은 채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밤, 잠들기 직전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나만큼이나 애인도 많이 놀랐을 거란 걸.
“여보. 여보도 많이 놀랐지?”
애인은 말없이 울먹이며 나에게 안겼다. 그리고 그날 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놀란 가슴을 쓰다듬으며 잠에 들었다. 아마도 준호도 영우가 패닉을 왔던 것만큼이나 많이 놀라지 않았을까? 그리고 딱 그만큼 간절히 바라지 않았을까, 영우의 패닉이 멈추게 해 달라고.
준호는 영우보다 먼저 짝사랑을 시작했음에도 영우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안 이후,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영우의 마음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준호는 공백의 시간을 갖는다. 그 숙고의 시간들 속에서 준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다음이 잘 상상이 안 가.
뭐가?
좋아하는 그다음. 뭔가 이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엄청난 각오가 있어야 할 것 같고 괜히 시작했다가 서로 힘들어질까 봐 무섭고.
너 무슨 백년가약 맺니, 응? 아, 뭐가 그렇게 심각해? 어? 만났다가 마음에 안 들면 쫑 내면 되지.
그런 얼마 못 갈 거 같은 마음으로는 시작을 하면 안 돼, 이 사람은.
얼마 못 갈 거 같은 마음인가 봐, 사실은?
아니야, 그런 마음.
7년째 연애 중인 나와 애인이 연애의 초입에서 심호흡을 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점점 우리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그리고 애인에게 있어 내가 안전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생기면서 애인은 내게 자신의 상처를 털어놓았다. 그런 애인에게 나는 다음의 말을 했다.
내게 그 이야기를 해줘서 고마워
그때부터 나는 애인과 나의 관계에 책임감이라는 것을 갖게 되었다. 준호의 말대로 "그런 얼마 못 갈 거 같은 마음"으로는 시작을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애인에게 상처를 드러내 보여도 포용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주었으므로, 그 정도로 애인은 내게 관계의 깊은 자리를 내어 주었으므로. 그렇기에 나의 작은 행동에도 애인은 상처받기 쉬울 것이라는 걸 나는 모를 수 없었다. 그는 내 앞에서만큼은 마음을 헐벗고 있었다.
그러면 우리 사귀는 거야?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던 순간, 애인은 내게 그럼 '오늘부터 1일'인지 물었다. 나는 묵직한 책임감을 느끼며 반짝이는 그의 눈망울을 마주하고 말했다. 너를 좋아하지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준호처럼 숙고의 시간을 가졌다. 내가 그에게 쉽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커다란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깨달음, 그 책임감을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각오.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 나는 '오늘부터 1일'에 yes라고 답했다. 너무 많은 책임감을 지니기엔 준호가 영우를 좋아했듯 나도 그를 좋아하고 있었으므로. 그리고 이미 사랑의 깊이만큼 책임감 또한 자라 있었으므로.
왈츠를 추신다고 생각하면 어때요? 쿵 짝짝 쿵 짝짝
비장애인만 아무렇지 않게 통과할 수 있는 한바다 건물의 회전문은 영우가 쉽게 들어설 수 없는 비장애중심주의의 견고한 벽을 상징한다. 그런데 첫 출근 날, 회전문으로 인해 로펌에 진입할 수 없는 영우에게 준호가 나타난다. 그러나 준호는 백마 탄 왕자가 되어 회전문으로부터 영우를 구해주지 않는다. 대신 영우가 스스로 회전문을 통과할 수 있도록 리듬을 맞춰 준다. 그리고 함께 회전문을 통과한다. 이는 두 사람이 함께 발맞추어 장애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벽을 넘을 것임을 은유하기도 한다.
영우를 대하는 준호의 태도는 처음으로 입을 맞출 때도 돋보인다. 준호는 비장애 남성으로서 장애 여성인 영우에 비해 사회적 우위에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관계 진전에 있어 매우 조심스럽고 관계를 이끌어나갈 주도권 또한 영우에게 쥐어준다. 입을 맞출 때도 먼저 다가섰다가 물러서는 영우를 보고 다시 물러난다. 그리고 이내 다가오는 영우를 부드럽게 안아주며 입을 맞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스며든다.
준호와 영우의 로맨스의 장점은 둘 중 한 명이 일방적으로 맞춰가는 내용이 아니라는 점이다. 작가에 의하면 자폐라는 이름 때문에 자신에게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 인물인 영우가 준호를 자신의 세계에 초대하여 발맞추어 가며 성장하고 준호 또한 자신의 세계에 영우를 초대한다.
누군가 나를 좋아하는 건 쉽지 않아. 너는 선녀지만 나는 자폐인이잖아
그렇게 자신의 세계에 살던 영우는 준호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알아가고 준호 또한 장애가 있는 여성을 사랑하는 세계를 경험한다.
그렇게 각자 다른 세계에 살던 영우와 준호는 서로의 세계에 스며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