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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인 Sep 21. 2020

딸에게 쓰는 편지:가난을 느끼지  않을 권리에 대하여

 

이 책은 4대째 10대 출산과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던 '모계 가족 빈곤사'이다. 저자의 증조할머니, 할머니, 엄마는 빈곤과 젠더가 교차할 때 주로 발생하는 10대 출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성들이었다. 저자는 4대째 내려오는 굴레를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중요한 삶의 선택의 기로에 있어 "내 딸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살아왔다고 고백한다. 이 책은 그 딸에게 보내는 편지로 이루어져 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딸에게 보내는 이 편지에는 가족들의 빈곤과 더불어 그들이 빈곤할 수밖에 없었던 미국의 불평등한 신자유주의 사회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있다. 싱글맘 복지 수혜자에게 낙인찍던 미국 사회에서 빈곤은 낙인  자체였지만, 삶은 낙인이   없다. 이 책은 그 삶에 대한 책이다.


"그 이야기를 하려니 부끄럽구나." 복지 혜택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어. <하틀랜드> p198


 저자가 80년대 신자유주의가 팽창하는 미국 사회에서 자랐다면, 나는 90년대 후반 급격한 신자유주의화가 진행되던 한국 사회에서 자랐다. 다음의 글은 그 사회에서 늘 부끄러움을 느끼며 복지 수혜자로 살았던 내가 나와는 계급이 다를 내 딸에게 쓰는 편지이다.



 나는 너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늘 너를 질투하곤 했어. 너는 내가 어린 시절에 누리지 못했던 계급의 삶과 정상성을 누리고 있을 것 같았거든. 어린 나는 공부를 잘하는 내가 내 가족들, 그리고 고향의 친구들과는 다른 계급의 삶을 살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어. 내 가족과 다른 계급일 너는 나처럼 조손가정이라는 걸 들킬까 봐 전전긍긍해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기초생활수급자라는 게 들킬까 봐 서류를 제출할 때 누가 볼까 숨기는 경험을 하지 않아도 될 테고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는 영화나 책에서나 보게 되겠지. 그리고 아마 대졸 이상의 부모를 두었을 테고. 그래서 어릴 때부터 너를 생각하면 미치도록 질투가 나더구나.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졌을 너. 내가 느꼈던 좌절과 슬픔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을 갖추지 못해 그저 나의 경험을 동정하거나 나의 슬픔을 무지하게 받아들일 너.


 그런데 사실 어릴 때 나는 내가 빈곤 계급이라고 느끼지 못했어. 정상가족 테두리 밖의 조손가정이었지만 그거야 사회에서 불쌍하게 보는 게 문제지,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었어. 매 끼니마다 맛있는 생선구이 반찬과 나물반찬이 끊이지 않았고, 내가 친구에게 파스텔을 빌리려 하자 그것을 볼 수 없었던 할아버지는 빌려 쓰지 말고 사서 쓰라고 4천 원을 챙겨줬어. 한 번도 학원에 다닌 적은 없지만 초등학생 때 '방과 후 교실'이라는 공부방을 다닌 적이 있는데 지금의 지역아동센터 같은 곳이야. 차이점이 있다면, 지금의 지역아동센터는 학원을 다닐 수 없는 계층의 아이들이 주로 다니는 계급화된 돌봄·학습 공간이지만, 내가 살았던 지역에서 방과 후 교실은 모든 계층의 아이들이 다녔던 공부방이어서 내가 남들과 다르다고 전혀 느끼지 못했어. 왜냐면 내가 살았던 농촌 지역은 고르게 가난한 곳이었거든. 고르게 가난한 지역에서 방과  교실처럼 '보편적 복지' 받으며 자란 나는 가난을 느끼지 않을  있었어.


 그런데 역설적으로 가난에 대한 자의식은 복지혜택을 받으면서 시작되었어.


 중학생인가 고등학생일 때부터 기초생활 수급자로 등록되면서 "기초생활 수급자인 것이 혹시 들킬까 봐", 또는 내가 수급자임을 아는 사람에겐 "충분히 가난해 보이지 않을까 봐" 엄청난 자기 검열이 시작되었어. 담임교사들은 시스템 조회를 통해 내가 수급자인 걸 알고 있을 텐데 내가 수학여행에서 입은 옷이 "수급자 같아 보이지 않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싶었고, 병원비를 면제받는 것을 친구들이 볼까 봐 늘 조마조마한 마음이었어. 그래서 내가 내곤 하던 수급자 증명서는 언제나 반이 접힌 채였단다. 제출해야 하니까 반듯하게 접지도 못하고 수급자 증명서인 걸 숨겨야 하니까 어정쩡하게 접은 모습이었지. 어정쩡하게 접힌 종이의 모습이 마치 내 자존심 같았어.

도대체 가난함은 무엇일까? 아니, '가난다움'은 대체 무엇일까?

가난한 사람은 입성 좋은 옷을 입고 만원이 넘는 식사를 하면 안 되나? 이것만은 분명해. 내가 경험한 가난은 낙인이었어. 사회가 나에게 찍고 내가 나 자신을 매일 다그치며 검열한 낙인 말이야. '가난하다'라고 분류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평등의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에서 가난은 증명과 인정의 문제야. 자신이 가난함을 끊임없이 증명함으로써 인정받아야만 교육, 의료, 주거 등의 평등을 조금이나마 얻을 수 있는 거지. 그래서 우리 할머니와 나의 부양의무자로 등록된 내 아버지는 우리가 수급자 조건에 맞도록 일부러 비정규직으로 일해야 했어. 나에겐 억지로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하는 아버지를 보는 것, 아버지가 그것으로 우리에게 생색내는 걸 보는 것이 모멸스러웠지. 20대 초반의 나는 양질의 겨울 잠바를 사는 게 그렇게 눈치가 보이더라. "가난한 사람인 내가 이렇게 비싼 옷을 사도 되나" 이렇게 수급자라는 지독한 자기 검열에 떨던 19살의 내가 있던 교실에서 사회문화 교사가 '복지병'에 대해 언급하더라. 하하. 그래,  그대로 가난한 이에게 낙인찍을  쓰는 모멸적인 용어,  '복지병' 말이야.


 사회문화 교사는 꽤 진보적인 30대 여성 교사였어(그래 봤자 신자유주의적인 제도적 민주주의자로 분류될 수 있겠지) 그런데도 ‘복지병’이라는 단어를 수업자료와 수업에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어. 그 교사에 이르면, 70년대에 이르러 사람들이 '복지병'에 걸려 노동을 게을리하면서 경제가 어려워졌는 거야. 너도 알겠지만 이 말은 빈곤 계층이 빈곤한 이유를 불평등한 사회가 아니라 그들의 '게으름'의 문제로 낙인찍는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적 담론이야. 나중에 내가 <신자유주의의 역사와 진실>(강상구)라는 책에서 찾은 것에 의하면, 70년대 경제 불황의 원인은 기술혁신이 부진하면서 생산성이 지체되었기 때문이야. 그런데 자본가들은 기술혁신을 하기보다 임금을 깎고 해고를 쉽게 하고 세금을 적게 냄으로서 복지 제도를 없애는 방식으로 부족한 이윤율을 만회했어. 자본가들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그런 건데 이게 왜 문제냐고? 너도 알겠지만 니 질문에는 모순이 있어. 자본가들이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사회에서 용인되는 이유는 그들만이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용률을 높여 많은 노동자들과 함께 잘 살기 위해서야. 그런데 임금을 깎고 해고를 쉽게 하면 많은 노동자들이 잘 살 수 없겠지? 그래서 이런 신자유주의 정책 이후로 빈익빈 부익부, 즉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지고 부유한 사람은 더 부유해지는 불평등이 심해졌어. 그런데 신자유주의자들은 복지 정책을 없애는 이유로 충분히 가난하지 않은 이들이 복지 수혜를 받기 때문이라며 졸렬한 핑계를 댔지. 실제로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복지 수혜를 받는 흑인 싱글맘에게 '복지 여왕'이라는 멸칭을 붙이고 그들을 사회의 악으로 규정했데. 진짜 악은 따로 있는데 말이야.


 19살의 나는 당시 수업이 뭔가 빻았다는 것은 인지했지만, 이 정도의 말빨을 갖추지 못해서 잠자코 앉아 있었어. 아마 그 교사도 나의 띠꺼운 눈빛은 느꼈을 거야. 그런데 거기 앉아 있었던 나의 친구들이 그 교사의 수업을 흘려들으면서 빈곤에 대한 낙인을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하지 않았을까 싶어. 최악이지.


 참고로 그때 그 교사가 언급한 '복지병'이 내게 상처를 입히지 않았어. 나는 '복지병'이라는 멸칭보다도 훨씬 단단하고 귀한 사람이거든. 뻥이고 사실 그 '복지병'이라는 낙인의 범주에 나 또한 포함된다는 것을 당시엔 인지하지 못했어. 고등학생 때 나의 자아는 '공부 잘하는 애'였거든. 내 계급보다 내 성적이 나의 정체성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어. 왜냐면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공립이어서 학비가 저렴했고 학원을 다니지 못해도 EBS 인강이라는 게 있어서 대체가 가능했어. 시골학교다 보니까 지원금을 많이 받아서 무료인 교육 프로그램도 많았어. 영어회화 수업, 논술 수업 같은 게 한 달 만 원대였나, 무료였던 것 같아. 신축 기숙사도 저렴했어서 나는 처음으로 보일러가 들어오지 않던 공부방에서 벗어나 따뜻하고 쾌적한 곳에서 공부할 수 있었어. 그런데 내가 인서울 대학에 가니까 나의 처지가 좀.. 다르게 느껴졌어. 고르게 가난한 곳이서 보편적인 교육을 누릴 수 있던 내가, 잘 사는 애들이 많이 다니는 높은 교육비의 '좋은 대학'에 다니니 그제야 내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된 거지. 생활비와 주거비를 모두 감당해야 했던 나는 학교 앞 자취는 꿈도 못 꾸는데 월세, 전세로 사는 친구들이 그렇게 엄청나 보이더라. 어학연수나 교환학생 비용은 평균 500만원에서 천만원에 이르러. 부모에게 미안해도 어학연수와 교환학생에 도전해보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그런 경험을 일찌감치 포기했어. 고등학생 때랑 다르게 교육비와 생활비가 높아진 대학 사회에서 선별적 복지 수혜(기숙사, 장학금 ) 통해 그나마 학교를 다녔던 나는 그제야 나의 계급을 인식했던 거지. 내가 다르다는 .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찢어지게 가난한 모습은 아니었어. 나는 봉구스 밥버거를 먹느니 6천 원짜리 식사를 사먹는 편이었어. 3만 원짜리 바지, 만 원짜리 티셔츠, 5만 원짜리 코트를 입고 다녔어. 언젠가는 마지막 알바비로 30만 원짜리 모직 코트도 사 입어본 적이 있어. 이런 내가 가난하지 않은 거 아니냐고? 가난의 형태는 세대와 젠더, 장애여부 등에 따라 달라.  아빠는 당연히 고졸이 되었지만, 우리 고모들은 산업체 고등학교를 통해 간신히 고졸이 되었어. 그 중 한 고모는 자수성가해서 자식들을 유학 보냈지만, 나는 겨울이면 보일러가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그 방이 원래 옛날 집의 마루였어서 보일러가 들어오지 않았어) 추위에 떨며 EBS인강으로 공부했지. 인구 대부분이 대학을 가는 요즘에도 장애인의 절반이 초등학교 이하의 학력이야(<장애학의 도전>(김도현)). 하지만 나는 비장애인이어서 비장애 중심적인 학교를 별다른 어려움없이 다닐 수 있었어. 학원에 다닐 형편은 안되었을지언정 국가가 나의 학비를 감면해준다는 걸 알았기에 상급학교로의 진학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지. 국가장학금같은 제도가 아니었다면 서울소재 대학을 잘 다닐 수 있었을까 싶어. 그래서 내가 상대적으로 덜 가난할 수도 있고 더 가난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아.다시 한번 말하지만 가난의 형태는 세대, 장애 여부, 젠더, 가족 형태, 복지 수혜 여부 등에 따라 다양해.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너 정도는 가난한 것도 아니야'라며 함부로 판단할 수 없어. 고등학생 때 사회문화에서 상대적 빈곤과 절대적 빈곤의 개념의 의미를 배운 적이 있어. 상대적 빈곤은 사회 구성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곤하고 절대적 빈곤은 최저의 생활수준이라는 거지. 나는 그 정의에 동의하지 않아. 내가 생각하는 '절대적 빈곤'의 의미는 '가난한 이라면 이 정도는 가난해야 한다고 사회가 정한 규칙'이야. 사회가 '가난다움'을 정한 거지. 마치 여자다움, 남자다움 같은 편견과 고정관념처럼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비판해야 하는 건 '가난한 이'들이 아니야. 가난한 이는 게으를 것이라는 편견, 가난한 이는 돈까스를 사먹을 수 없다는 '가난다움'에 맞서야 해.


 대학교 2학년 때 나는 드디어 학교 근처에서 살 수 있게 되었어. 내가 기초생활수급자라는 이유로 신축 기숙사에 붙었거든. 비용은 월 10만 원 정도라 그 정도는 내가 낼 수 있었지. 그런데 그때도 사실 내 학점에 그 좋은 기숙사에 붙을 성적이 아니어서 내가 수급자라서 붙었다는 걸 내 룸메이트나 친한 동기가 알게 될까 봐 늘 조마조마했어. 다음 학기가 되자 기숙사를 신청하려고 증명서를 바리바리 챙겼어. 수급자 증명서, 가족증명서, 그리고 내 부모가 이혼했기 때문에 부모 각자의 가족증명서, 주민등본까지.. 그런데 기숙사 행정 직원에게서 전화 왔어. 내 증명서가 이상하다는 거지. 부모가 아니라 할머니랑 주민등본에 살고 있으니까.


나 "저는 조손가정인데요?"

행정 직원 "그럼 조손가정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가져오세요"

나 "조손가정 증명서는 없어요. 대신 다른 증명서를 낼게요. 그런데 저는 정말 조손가정이 맞아요."


그러자 행정 직원이 말했어.

그럼 엄마는? 엄마는 뭘 했는데?

 그 말을 듣자 내 안의 억센 슬픔이 주먹으로 목구멍을 치는 것 같았어. 이미 눈물이 앞을 가리고 있어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던 나는 옆에 있던 내 애인에게 전화를 대신 넘겨주었어. 우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거든. 애인은 행정 직원에게 "말씀을 그렇게 하시면 어떡합니까?"하고 정중하게 화를 냈어. 그런데 나는 그 직원이 나의 가난을 선별해서 기숙사에 뽑는다는 걸 아니까 화내는 애인이 더 야속하더라.


 나는 니가 이런 모멸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니가 모멸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부모인 내가 너의 비싼 주거비(땅값도 정말이지 불평등의 문제야)를 감당해주는 방법은 아니었으면 좋겠어. 너의 친구들 중 한 명은 이런 모멸을 여전히 겪을 테니까. 이런 모멸이 더이상 생겨나지 않기 위해서 주거, 교육, 의료의 평등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가난을 증명하라고 요구하지 않으면 좋겠어. 소수를 선별하는 비용을 많은 이들이 평등을 누릴 수 있는 기회에 쓰면 좋겠어. 그 과정에서 가난이 더이상 낙인이 되지 않으면 좋겠어. 가난한 이로 선별되었다고 나처럼 ‘가난다움’의 강박도 안 느끼면 좋겠어. 가난한 이도, 가난하지 않은 이도 부담갖지 않고 최소한 주거와 의료, 교육의 비용을 부담할 수 있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내가 꿈꾸는 사회는 말이야,


가난해도 가난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사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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