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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인 Feb 22. 2021

새벽에 사후피임약을 타러 응급실에 달려가며

임신중단, 최소한의 안전장치

시발 시발 시발 시발 시발 시발 시발 시발 시발 시발


좆됐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피임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말 그대로 멘붕이 왔다. 파트너는 당황한 나를 안심시켜주려고 다가왔지만, 나는 일단 그에게 지금 당장 사후피임약을 처방받으러 갈 수 있는 병원을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씻는 동안 멘붕이 온 나는 당황하고 욕하고 당황하고 욕하고를 반복했다.  시발 시발 시발 아 시발!!!

한 겨울에 슬리퍼를 신고 파트너의 차를 탔다. 차분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파트너는 차를 거칠게 모는 법이 없다. 하지만 그 날만큼은 그렇게 빠르게, 또 거칠게 차를 몬 적이 없었다.  내가 그의 차를 타 본 이후로는 처음으로 주차하다 보도를 밟아 차가 덜컹거렸다. 그에게 ‘천천히, 조심히, 괜찮아’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우리 둘 다 하나도 괜찮지 않았고 하나도 천천히 조심하고 싶지 않았다.


사후피임약의 피임률은 100%가 아니다. 성공률은 단 95%. 이 5%의 임신 확률에 이리 초조해지는 것이다. 재빨리 사후피임약을 먹어서 그 5%의 임신율을 (낮출 수만 있다면) 낮추고 싶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사후 피임약 처방받으러요.”
“네?”
우리는 동시에 소리쳤다.
“사후피임약 처방받으러 왔다고요!”

중년의 남성은 갸우뚱하며 ‘어느 분이 복용하실 건가요?’하고 물었다. 급박한 와중에 웃음이 나왔다. 당연히 여성인 내가 먹지 남성인 파트너가 먹을까? 동시에 저 나잇대 남성이 얼마나 피임에 무지하면 저런 소리를 할까 싶었다. 그리고 아마 그 남성의 피임 무지는 파트너 여성의 독박 피임(혼자 임신일까 두려워하기, 임신 중단 시술, 약 복용 등)으로 연결될 것이다.


병원에 들어선 우리는 다시 한번 사후피임약을 처방받으러 왔다고 알린 후, 대기실에서 함께 기다렸다. 원치 않게 부끄러움이란 것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 새벽에 사후피임약을 처방받으러 온 젊은 남녀라니. 분명 하룻밤 섹스를 즐기고 책임질 수 없는 임신을 막기 위해 달려온 무책임한 젊은 커플로 보겠지? 임신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 상황에 대한 기막힘, 사후피임약을 처방받으러 온 것에 대한 수치심에서 허우적거리다 문득 생각했다. 만약 우리가 결혼한 부부라면?


표면적으로는 섹스가 이성애 부부의 영역으로 제한된 한국 사회에서 우리가 결혼한 부부였다면 우리의 섹스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섹스를 점잖게 ‘부부관계라고 호칭하지 ?) 사후피임약을 처방받으러  것도 우리의 ‘자녀 계획하기 위한 점잖은 권리 이행에 불과할 것이다. 자녀를 낳고 싶을  낳는 재생산권(reproduction right) 보장받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몰려오는 수치심에 등을 돌릴  있었다. 여전히 결혼하지 않은 여성의 섹스를 터부시 하는 사회이지만, 어쨌든 나와  파트너는 자녀를 낳을/낳지 않을 재생산권을 보장받은 존엄한 개인이다.


새벽에 사후피임약을 타러  수치심과 임신에 대한 두려움, 작은 실수 때문에 이런 초조함을 겪어야 한다는 슬픔이 몰아치는  마음을 관찰하다 보니 어느새 의사의 진찰을 받으러  차례가 되었다. 다행히(?) 의사는 성이었 차분하고 그리고 신속하게 사후피임약에 대한 주의 사항을 일러 주었다. 나에 대한 편견의 시선도, 또는 피임에 대한 무지도 없었다.(전에 사후피임약을 처방받기 위해 만났던 남의사는 질내 사정이 아니면 사후피임약을  먹어도 괜찮지 않냐고 되물었다.  )  의사는 사후피임약의 피임률이 100% 아니라 95% 불과하다는 ,  다음 생리가 시작되기 전에 다음 섹스  피임에 실패하면 다시 사후피임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다는 것을 공지해주었다. 나는 내가 존중받고 있다고 느꼈다. 페미니스트인 나조차 새벽에 사후피임약을 타러  것에 부끄러워하며  자신을 존중할  없는 상황이었는데 여성 의사는 실수한 나를 다그치고 가르치려는 태도 없이, 따뜻하게  눈빛을 바라보며 차분하고 신속하게 사후피임약을 처방해 주었다. 나는 내가 피임이라는 재생산권을 당연한 권리로서 보장받고 있다고 느꼈다. 아마도 그녀 또한 여성이기에 임신에 대한 나의 공포를 이해하고 있어 '차분하고 신속한 존중' 나올  있었으리라. 새삼 여성 의사의 소중함을 느꼈다.


혹시 임신이 될 경우를 대비하여 인터넷에 '미프진'을 검색해 보았다. 미프진이라는 약물은 호르몬 조절을 통해 자연 유산을 유도하는 '유산 유도제'이자 먹는 임신중절 약이다. 직접 자궁에 기기를 삽입하여 긁어내는 소파술에 비해 안전하다. 2021년, 낙태죄가 폐지되었지만 아직도 미프진은 식약청의 허가를 받지 않아 국내에서 안전하게 처방받을 수 없다. 한숨을 쉬며 기사를 더 찾아보다 깊은 빡침의 헛웃음이 나왔다. 임신 중단 시술이 줄고 피임률을 늘었는데 이것이 인구 감소의 원인이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나는 비교적 자원이 많은 여성이다. 피임과 임신, 출산 등에 대한 부담을 함께 지기 위해 노력하는 남성 파트너가 있고(대부분의 여성들은 혼자 사후피임약을 처방받아 복용하고 많은 남성 파트너들은 남의 일인 양 대한다.) 피임에서 실패가 있었을 경우, 바로 사후피임약을 복용하면 된다는 것을 안다(이 사실을 모르는 여성이 정말 많다). 또한 도시에 살고 있고 파트너가 차를 소유하고 있어 새벽에 5분 내로 응급실로 향할 수 있었다(병원이 적은 농촌에 거주하며 차가 없다면 이렇게 신속하게 사후피임약을 처방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임신한다면 소파술보다 안전한 미프진을 해외에서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위민온웹에서 문진 진료로 의사의 처방을 통해 구매 가능). 또한 낙태죄가 폐지된 상황에서 임신 중절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나는 임신이 두렵다.

만약 여성의 재생산권이 충분히 보장된 사회일지라도 나는 임신이 두려울 것이다. 모든 남성 파트너가 피임과 임신, 출산, 양육의 부담을 함께 지려고 하는 사회, 사후피임약을 약국에서 처방받을 수 있고, 미프진을 합법적으로 국내에서 구매할 수 있는 사회, 임신중절 시술에 의료보험이 적용되어 저렴한 가격에 안전하게 시술할 수 있는 사회, 만약 출산을 선택했다면 학업 또는 직장을 중단할 걱정 없이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사회, 혼전 임신이든, 미성년 임신이든, 비혼모 임신이든 차별받지 않고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일지라도


나는 임신이 두렵다.


사후피임약을 복용하는 것, 미프진을 복용하는 것, 임신중단 시술을 받는 것 모두 부작용이 따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의 건강에 해가 될 수 있는 부작용을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 임신이라는 비일상적인 사건으로 인해 나의 일상이 어그러질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계획되지 않은 임신이 두렵다'.


그렇기에 안전한 임신 중단은 정말이지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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