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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인 Jul 10. 2021

[선덕여왕 리뷰] 시리도록 슬프고 아름다운 세계에서

광원의 비덕 세계관에서 나타나는 사랑에 대해, 다시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 글은 드라마 <선덕여왕> 팬픽션 작가 광원님의 글에 대한 문학평론 겸 사랑에 대한 간단한 소고입니다.

광원 <악몽> https://light-source.postype.com/post/7171955

광원 <무제 6월 6일자 > https://light-source.postype.com/post/7172261





"비담에게 덕만은 사랑하는 사람이라서요."


광원의 세계관에서 비담의 눈에 비치는 덕만은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유리조각 같다. 빛의 맞닿음에 균열하며 깨지는 아름다운 존재, 그러나 깨진 유리 조각이기에 여리디 여리다. 그럼에도 모든 고통을 짊어지고 자신의 고통에 다가서려는 비담조차 밀어내는 덕만의 존재는 아슬아슬하다. 덕만은 오로지 홀로 버텨내고 있다. 걱정스러울 정도로.


덕만이 마지막으로 웃어 준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동안의 냉담한 얼굴, 둘만 남았을 때조차 보이던 여왕의 표정. 그에게서 입술을 떼어낼 때의 단호함. 비담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주로 그런 모습이었다.

                                                                                                            <무제 6월 6일 자 >


언제나 가늘어지기만 하는 여왕의 몸. 새벽 공기보다 차갑고 달빛보다 눈부신, 곧 부서질 듯 아슬아슬한 여인의 몸. 피부로 전해지는 연약함이 얼마나 생생한지... (중략)

 평소였다면 비담의 손길까지도 밀쳐내고 등을 돌릴 덕만이었다. 싸늘한 음성으로 몇 마디 대꾸했을 것이다. 꿈을 꾼 것뿐이야, 하고. 다시 잠들지 못해 뜬 눈으로 남은 어둠을 지새우면서도 자신의 약한 모습은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비담이 그 모두를 목격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아니, 비담의 어떤 것도 용서하지 않았다.

                                                                                                                            <악몽>


나는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왜 비담의 눈의 비친 덕만은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유리 조각처럼 여린 존재인가. 광원은 답했다.

"비담에게 덕만은 사랑하는 사람이라서요."


광원의 문체는 적확하고 명징한 언어로 본질을 명명하지 . 그보다는 안개와 구름 같은 문장을 조심스레 배치함으로써  문장을 헤쳐나가는 독자로 하여금 모호함 속에 존재하는 세계를 발견하며  심상에 젖도록 유도한다. 그렇게 광원이 빚어낸 시리도록 슬프고 아름다운 세계는 독자로 하여금 정인을 잃은 덕만의 비통한 심상을 감히 느끼도록 한다. 때로는 일상의 반짝거리는 희망을 주워 올리고 혹은 비담과 덕만의 못다  사랑을 흘려보낸다.


"비담에게 덕만은 사랑하는 사람이라서요."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광원의 답변은 그 어느 때보다 함축적이며 명징하다. 이유 또한 간단하다. 비담에게 있어 덕만은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드라마 <선덕여왕>의 세계관에서 덕만을 유일하게 '덕만'으로 대하는 이는 오직 비담뿐이다.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의 목적이 권력이 아니라 사랑인 비담은 오직 덕만에게 닿기를 갈구한다. 덕만은 왕이기에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반역으로 명명됨에도 비담은 기꺼이 덕만의 이름을 부르고자 한다. 그렇게 제왕 덕만을 연인으로 대할 수밖에 없어 가차 없이 흔들리던 비담의 존재는 불안한 추동을 멈추지 못하고, 결국 반역자가 되어 찬란히 파멸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덕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이렇듯 드라마 <선덕여왕> 세계관에서 덕만을 폐하가 아닌 '덕만'이라는 개인으로 헤아린 이는 오직 비담뿐이었으며 그렇기에 덕만의 고뇌와 힘겨워하는 여린 뒷모습을 엿본 이 또한 오직 비담뿐이었다. 모두가 자신의 이(利)를 위해 수북한 장계를 올리며 덕만의 재가(왕의 허락)를 기다릴 때, 비담은 그 장계를 지나쳐 덕만의 이부자리를 펴준다. 가만히 덕만의 마음을 토닥이며 잠들 수 없었던 왕의 조마조마한 마음을 보듬어준다. 그토록 기다렸을 덕만의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에도, 고독한 왕좌에 짓눌려 연모의 감정까지 억눌러야 했던 덕만의 지난날을 안쓰러워한다. 그렇기에 덕만을 바라보는 비담의 눈가는 언제나 아련하게 젖어 있으며 광원은 이를 기꺼이 사랑으로 명명했다.


 함께 잠자리에 드는 날이면 비담은 먼저 깨어나 덕만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신국의 악몽이란 악몽은 죄다 끌어안아 꿈에서도 쉬지 못하는 쓰라린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새겨 넣었다. 왕의 임무에 그런 것까지는 없다고, 비담은 식은땀에 젖어드는 덕만의 잔머리들을 넘겨주며 못마땅해했다.

                                                                                                                            <악몽>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의 형태란 무엇인가. 아니, 비담과 덕만은 사랑하긴 했는가. 사랑에 대한 경험이 각자의 삶에서 진동하고 파장하는 정도가 다른 남루한 현실 속에서 인간은 결국 사랑이란 무엇이며 사랑의 끝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제각기 내놓을 수밖에 없다. 한 줌의 선덕계에서조차 덕만에게 비담은 무엇이었으며 그들은 결국 사랑했는가 여부에 대한 견해가 난무하는 가운데, 광원은 조심스럽게 그것은 사랑이었음을 밝힌다. 그러지 않는 사람이 그럴 수 있게 하는 것, 자라지 못한 사람에게 사람의 마음을 알게 하는 것, 왕이 된 사람에게 사람의 마음을 갖고 싶게 하는 것. 광원에 의하면 그것은 사랑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의 후반부에 이르러 비담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지엽적 행동을 한다. 백제와의 전쟁으로 신라의 안위가 불안한 상황임에도 국서의 후보가 되기 위해 상장군 유신을 궁지로 밀어 넣는 것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목적은 언제나 덕만이기에, 미련하게도 비담은 덕만의 굳은 어깨에 손을 뻗는다. '네가 날 안으면 떨리지 않는 줄 아냐'는 덕만을 왈칵 제 품에 밀어 넣는다. 왕이기에 아무도 자신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사무치는 고독을 토로하는 덕만에게 그렇다면 자신이 그 이름을 불러주겠다며 호소한다. 광원에 의하면 그것은 선택지를 내미는 행위다. 그리고 이것은 광원의 말대로 덕만을 변화시킨다. 감정을 느끼는 감각까지 스스로 베어내야 했던 덕만은 '본인도 기대하지 않았던, 그래서 필요하지 않았던, 더는 아무도 건네지 않는 선택지'를 유일하게 건네는 비담의 손길 속에서 오래전 스스로 버렸던 감각을 되찾는다. 그것은 사랑이다. 힘들 때 기대고 흔들릴 때 서로를 믿는 관계 맺음에 대한 소망.


덕만은 미실과 맞서 모든 것을 거는 동안 너무 많은 소중한 이를 잃어야 했다. 불타오르는 동굴 속에서 첫 숨을 불어넣어 주었던 엄마 소화를, 사람으로 살라며 덕만을 보내고 적진에 남기를 자처했던 언니 천명을, 덕만은 그렇게 너무 많은 이를 잃었다. 그리고 패도의 길을 작정한 이상 홀로 모든 고난을 감내해야 하기에, 결국 덕만은 감정을 느끼는 감각까지 스스로 절단하기에 이른다. 누구보다 사람을 믿고 따르기를 좋아했던 덕만은 믿었던 신하조차 끊임없이 가늠하고 견제해야 하는 제왕의 길을 오로지 홀로 버틴다. 그러나 비담만큼은 달랐다. 덕만이 공주가 된 후에도 전과 다름없이 덕만을 대했던 예전처럼, 비담만은 덕만이 황제에 오른 후에도 변함없이 덕만을 덕만으로 대한다. 덕만의 마음을 보듬으려 하고 덕만과 그 마음을 나누려 한다. 덕만을 연인으로 대하는 마지막 존재가 있음을 끊임없이 그녀에게 알린다. 결국 덕만은 오래전 깊은 마음속 어딘가에 넣어 두고 봉인해 두었던 자신의 감정을 꺼내 들기에 이른다. 비담에게까지 기댈 수 없고 비담까지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덕만은 10년 만에 흔들리는 눈동자를 드러내며 자신의 고독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결국 '네가 있어야겠다'며 비담에게로 발걸음을 돌린다. 홀로에서 함께로, 제왕의 자리에서 인간의 길로. 광원에 의하면, 이것은 사랑이다.


다시 한번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니, 사랑이란 무엇인지 감히 누가 확답할 수 있는가.

현실 속 사랑은 지루하고 고루하며 비참하다. 이 비루한 현실 앞에 여성들은 안전 이별을 걱정하며 남성들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한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현실은 오히려 자본주의와 결합한 사랑 상품, 즉 로맨스의 판매를 촉진한다. 나는 감히 맑스를 빌어 사랑이란 지루한 노동이라 주장하고 싶다. 맑스에 의하면 노동이란 인간의 창조적 활동이다. 이 관점에서 사랑은 노동이다. 그것도 지루한 노동. 하루하루 반복되는 지겨운 임금 노동자의 삶을 '함께' 버텨내는 것, 때론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참으며 상대를 헤아리고 대화를 시도하는 노력, 쌓여 있는 설거지를 미루지 않고 꾸역꾸역 해내듯, 미루고 싶은 마음을 뒤로하고 너의 마음을 안아주는 하루하루. 그렇기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이란 어찌할 수 없는 감정에 빠져드는 수동태가 아닌 꾸준한 노력의 수행 과정인 능동태임을 강조한 바 있다. 어쩌면 그래서 더더욱 현대인들은 사랑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쌓여있는 설거지거리보다 TV 브라운관 속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은 그저 찬란히고 그저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담과 덕만의 비극적 사랑은 바로 그 상품적 지위에 위치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덕만을 바라보면서 온전히 기뻐하지도 못하고, 연모의 감정까지 억누르며 왕좌를 지켜야 했던 덕만의 고통을 헤아리는 비담의 마음을, 우리는 잠시 사랑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격무와 불면증에 시달리는 덕만을 토닥토닥 잠재우는 비담의 손길과 눈빛을 잠시 사랑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여전히 여성을 소유하고 평가하며 통제하려 드는 남성의 태도가 '연애'로 정당화되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마음을 기꺼이 보듬으려는 돌봄의 미학을 우리는 사랑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오늘만큼은 고루한 현실에 눈 감은 채 잠시 사랑의 의미를 음미하고자 한다. 지루한 노동으로서의 돌봄을. 그 지루함에서 피어나는 찬란한 아름다움을. 그리고 그것이 사랑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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