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길의 소설을 읽을 때면 이게 현실이야 하고 망치로 머리를 꽝 얻어 맞는 듯한 기분이 든다. '여자는 여자의 친구다', '보돕보', '자매애' 등이 페미니즘의 구호가 된 시대이지만, 난 모든 여자가 모든 여자의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믿는 회의적인 여성이다. 같은 여성이라도 서 있는 위치가 제각기 다르며 바로 그 위치성에 따라 관계가 구성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의 말단에 위치한 며느리로서의 어머니에게 유일한 식민지는 또다른 여성, 바로 딸이다(다 된 만화에 페미니즘 끼얹기, 탱알 지음). 양육자와 자식이라는 권력 관계 속에서 어머니들은 딸을 아들과 차별하기도 하고,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배설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딸들은 과연 엄마를 사랑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페미니즘 연극팀 메두사 2019 공연 “우리는 엄마를 사랑할 수 있을까”). 성폭력 가해자의 선처를 구하기 위해 피해자를 공격하거나 피해자에게 용서를 비는 이들은 대부분 가해자의 아내, 딸 등의 여성 가족이다. 정치적, 경제적 공동체로서 가족이란 이름으로 가해자와 결합된 가해자의 여성 가족은 피해자 여성이 아닌 가해자의 편에 서는 것을 택한다. 젠더와 여러 정체성이 교차하는 현대 가부장제의 현실이다.
강화길은 특유의 음산한 분위기와 속도감 있는 문체로 여자가 여자의 친구가 될 수 없는 구조를 냉소적이고 명확하게 직시한다. 마을 이장의 성추행을 당하고 있는 가난한 여성과 연대하기는커녕, 오히려 성폭력 피해자를 험담하는 여성(손), 명절이면 늘 애는 언제 낳을지, 연봉이 그 정도밖에 안되냐며 비아냥거리는 여성(음복). 그러나 강화길은 단순히 여자가 여자를 미워하는 현실을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강화길의 소설 말미에 이르면 늘 여자가 여자를 미워하는 구조, 판, 즉 가부장제가 선명히 드러난다. 이 사회에서 가부장제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투명한 것이었다면, 강화길의 소설을 읽는 동안 투명했던 가부장제의 실체는 선명해진다. 너무나 선명해서 소름끼칠 정도로.
나는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페미니스트 판타지보다, 여자가 여자를 미워하고 혐오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가부장제의 실체를 드러낸 강화길의 소설이 더 좋다. 왜냐면 그게 현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