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성착취 100년의 역사 속에서 어떤 피해자는 민족의 순결한 누이로서 호명되는 반면 어떤 피해자는 멸시받아 마땅한 성판매 여성으로 질타받는다. 또 다른 피해자는 사회의 암묵적인 은폐 속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지난 시절 그러했듯 잊힌다. 이들이 일본군 '위안부'든, 한국군 '위안부'든 또 기지촌 여성, 기생관광 여성들, 성판매 여성, n번방 성범죄 피해자이든 이들이 겪은 폭력의 본질은 같다. 그것은 '성착취'였다.
<연극 줄거리>
1931년, 주인공 김공주는 가부장적인 가족에서 태어나 일본군 '위안부'로 인신매매된다. 그러나 가까스로 돌아온 조선 땅에서는 빨갱이로 몰려 한국전쟁 시기 한국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돌아오고 이후 생활고로 인해 미군 '위안부'로 유입된다. 이후 동두천과 용산 등에서 성매매 포주, 강남 호스트바와 미아리 집창촌에서 마담으로 전전한다. 숱하게 전업을 시도하지만, 빈곤에 발목 잡혀 번번이 실패한다.
연극 <공주들2020>은 김공주라는 인물의 생애사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 한국군 위안부 - 미군 위안부 - 기생관광 - 집결지 - 현대 성매매 - n번방 사건을 살펴본다. 이를 통해 끊임없이 반복되는 성착취의 역사가 성매매 체제의 연속성으로서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많은 배우가 무대 입장과 퇴장을 반복함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김공주는 무대 위에서 의상을 갈아입을지언정 무대를 퇴장하지 않는다. 아니, 퇴장할 수 없다. 100년간 반복적으로 성착취가 일어났던 한국사에서 여성들이 빈곤과 생존에 떠밀려 성매매로 유입되었듯, 성판매 여성에 대한 낙인으로 인해 탈성매매할 수 없었듯, 김공주는 무대를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날 수 없는 무대, 벗어날 수 없는 성착취(성매매)는 김공주의 '팔자'다. 그러나 연극 <공주들2020>을 본 관객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성매매·성착취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구조를 개인의 '팔자'로 만든 사회는, 남성의 폭력성을 성욕으로 정당화해온 사회임을. 그리고 여성의 '성'을 '성욕 해소'의 도구로 수단화해온 사회임을. 그렇기에 일본 군인의 성욕이 해소되어야 한다며 위안소 제도를 만든 일본 제국주의와 그것을 이어받아 정부가 직접 위안소를 운영한 한국 정부, 그리고 현대 성매매와 n번방의 수요자들은 모두 같은 얼굴이다.
김공주의 90여 년의 생애사는 피해와 가해를 경유하며 이어져온 굴곡진 삶이었다. 김공주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한국군 위안부 피해자였지만 이후 성매매 포주가 되어 성판매 여성들을 착취하는 가해자가 된다. 노년이 되어 빈곤·노인·여성이라는 상황은 또다시 김공주를 노인 성매매로 떠민다. 김공주는 순결한 피해자도, 악랄한 가해자도 아니다. 김공주의 삶에서 알 수 있듯 어떠한 인간도 피해자 또는 가해자라는 단일한 정체성으로 고정될 수 없다.
연극 말미에 이르러 김공주는 <구멍 토론회>에 초청받아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김공주의 발언은 중단되고 그와 동시에 김공주의 몸은 '소녀상'으로 굳기 시작한다. 김공주는 가까스로 한마디를 내뱉지만 이미 그녀의 몸은 순결한 민족의 누이로서(소녀상) 굳어져 그 말은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나는 위안부도 아니고, 피해자도 아니고, 소녀도 아니야.
그냥 김공주야. 김공주.”
살아있는 몸으로서 말하고 설치고 떠들되 멸시받던 김공주의 몸은 '소녀상'으로 굳어진다. 그럼으로써 성매매 포주이자 동시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던 김공주의 정체성은 민족의 피해자로서 고정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다층적인 삶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을 '순결한 소녀'와 '위안부 할머니'로만 기억하려는 2020년의 서늘한 풍경이었다
그동안 문학, 영화, 연극 등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대중에게 알리는데 몰두하느라 피해자들이 겪었던 성폭력 피해를 날것으로 전시하곤 했다. 그들이 얼마나 잔혹한 성폭력을 겪었는지 강조하는 것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다고 믿는 듯했다. 그러나 이러한 재현들은 일본군 '위안부'들이 겪은 성적 폭력성(gender violence)을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성(sex)을 강조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영화 <귀향>이 끝난 후, '귀향 엑기스'라는 제목의 영상들이 인터넷에 돌아다녔듯이 말이다.
때론 우리는 피해자가 겪은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알기 위해 그들이 겪은 폭력이 얼마나 성적으로 잔인했는지 굳이 알 필요가 없다.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알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수 있다. 연극 <공주들2020>은 개구리를 등장시킴으로써 김공주의 트라우마를 재현하고 무대에서 형상화한다. 김공주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 등 자신이 겪었던 성폭력 피해를 떠올릴 때, 초록빛 조명을 받아 초록색이 된 배우들이 개구리로 변하며 김공주를 덮치는 것이다. '압, 압' 소리를 내며 달려드는 커다란 개구리들의 존재는 김공주가 겪는 '압'박감을 의미하기도 하며, 어린 시절 김공주에게 여성의 정조를 강조했던 아버지의 법, 즉 가부장제를 의미하기도 한다.
영화 <눈길> 또한 성폭력 피해를 그대로 전시하기보다는, 소리를 통해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재현했다. 주인공이 위안소에 있을 때 군인들이 철문을 열고 들어오던 소리는 주인공이 할머니가 되었음에도 자다가도, 뜨개질을 하다가도 주인공을 덮쳐온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철문 소리가 들려올 때면 주인공은 마치 현재 위안소에 있는 것처럼 괴로워한다. 잔혹한 폭력의 전시가 아닌 소리를 통해 일상적으로 지속되는 트라우마를 표현한 것이다.
그동안 많은 작품들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겪은 성적 폭력을 재현하는데 강조하여 그들의 피해를 일본군에 의한 폭력 당시에만 고정시키는 역효과를 낳곤 했다. 그러나 개구리의 소리 '압'이 의미하듯, 일본군에 의한 성폭력 트라우마뿐만 아니라, 피해를 침묵시켰던 가부장제, 성폭력 피해자에게 죄책감과 자기혐오를 내재화시켰던 가부장제 또한 그들이 겪은 고통의 원인이었다. <공주들2020>에서 개구리가 소리치는 '압'은 자극적인 성폭력 피해 장면을 전시하지도, 성적 폭력(gender violence)을 성(sex)으로만 환원하지 않고도 피해와 트라우마를 전달한다.
<공주들2020>의 주인공, 김공주는 말한다.
윗구멍을 채우려고 아랫구멍을 내어줬더니 뒷구멍이 꽉 막혔어.
그랬더니 악취가.. 악취가...
극빈곤층 여성을 성착취(성매매)로 내몰았던 한국 사회에서 '먹고사는 것(윗구멍)'을 위해 성착취에 유입(아랫구멍)된 김공주의 삶이, 그렇게 버텨냈던 삶이 결코 만만치 않았음(뒷구멍)을 축약적으로 표현하는 김공주의 대사다.
연극 <공주들2020> 의 '공주(孔主)'란, '구멍의 주인'이라는 뜻을 의미한다. 인간은 입과 코, 항문과 성기를 지닌 구멍의 주인이다. 이로서 '공주'는 여성만이 아닌 남성까지 포괄함으로써 인간으로 확장한다. 그리고 이것은 성착취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닌 여남의 문제이자 곧 인간 사회 보편 문제임을 의미한다.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다. 남성들은 성을 구매함으로써 성매매 체제 영속에 기여하고 '남자의 사회생활'이란 핑계가 공공연히 성매매를 정당화한다. 남성중심적인 문화 속에서 '남자들이 모이면 원래 그런 것'이란 비합리적 믿음이 단톡방 성희롱을 정당화한다. '남자들'의 놀이 문화라는 명명이 n번방 성착취물 구매로 이어진다. 그리고 100여년 전, 군인의 성욕을 적절히 해소해 주어야 군기를 잘 관리할 수 있고 일반 부녀자들이 군인으로부터 당할 수 있는 성폭력을 막아준다는 믿음이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만들었다. 이러한 믿음은 한국 정부에 의해 한국군 '위안부'로 이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공주다. 앞구멍을 위해 아랫구멍을 내어줘야 했던 사람, 그 구멍을 구매하는 사람, 구멍의 구매를 재생산하는 사람은 모두 앞구멍과 뒷구멍, 그리고 아랫구멍을 지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성착취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닌 모든 인간의 문제인 이유다. <공주들2020>은 '공주'라는 제목을 통해, 그리고 성착취 100년의 역사의 무대에서 반복하고 퇴장하는 여남의 존재를 통해 인간 보편의 문제를 보여준다. 그리고 문제의 진실은 명확하다
성매매는 성착취이며 성착취는 인간 보편의 젠더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