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순간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선영 Jul 24. 2021

장마, 숨어서 하는 사랑

여러분, 비 좋아하세요? ‘사실상 올해 장마는 끝’이라는 기사를 보고 전 몹시 당황스러웠습니다. 그 어떤 소식도 이렇게 비보일 수는 없었죠. 마치 제대로 시작도 못한 채 끝나버린 짝사랑 같은 느낌이랄까요? 뜨겁고 습한 35도의 햇볕 아래에서, 솨-아 쏟아지는 시원한 빗줄기를 상상하며 비와 관련된 추억을 꺼내어 봤습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여름 비의 순간을 떠올리며 마음만이라도 잠시 시원해지길 바라요.



여름 하면 장마를 빼놓을 수 없고, 장마 하면 여름이 자동 연상된다. 서로를 완전히 떼고선 좀처럼 생각할 수가 없는 사이. 나 역시 장마와 그런 사이다. 일 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다는 점은 서로를 더욱 끈끈하게 만든다. 마치 지구 반대편 나라로 유학 간 연인이 잠시 입국하는 것과 같다 해야 할까. 그런 상황이라면 출발선에 선 육상 선수처럼 당장 공항으로 달려갈 채비를 하겠지만, 난 늘 붕붕 뜨는 몸과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집 안에서 조용히 기다릴 뿐이었다.


존재만으로 날 행복하게 하는 그것이, 우리 가족에겐 걱정의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비는 아빠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내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빠는 대형 탑차 기사로 일했다. 엄마와 할머니의 하루는 날씨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일기 예보에서 구름이나 물방울, 눈 결정체 모양이 나타날 때면 그들의 얼굴엔 순식간에 먹구름이 꼈다. 밥을 짓다가, 좋아하는 연속극을 보다가도 도로 위에 서 있을 자식 걱정, 빗길 위를 달릴 남편 걱정을 하며 창을 바라봤다. 빗줄기가 세질수록 그들 마음엔 걱정이 홍수처럼 불어났다.


한편 같은 창을 보면서 난 다른 생각을 했다. ‘와 신난다! 좀 있으면 비가 온다니!’ 하지만 내가 이 마음을 드러낸다면 그들의 마음은 더 무거워질 게 분명했다. 좋아한다 말하지 못하는 마음. 드라마 속, 이어지지 못하는 사랑을 하는 주인공의 마음이 이런 걸까? 당장 저 빗속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지만, 어떤 죄책감에 휩싸인 난 조용히 창문을 열었다. 창문틀에 턱을 괴고 콧구멍을 벌렁였다. 비 먹은 흙냄새가 콧속을 간지럽혔다.


어느 날은 우산 통에서 투명 우산을 골라 들고 집을 나섰다. 언젠가 가족 누군가가 갑자기 만난 소나기에 역 앞에서 3,000원 정도를 주고 샀을 게 분명한 우산. 급하게 산 싸구려라 잘 찢어진다는 이유로 보통은 부끄럽게 여겨지는 그런 우산일지라도 내겐 쓰임이 충분했다. 투명 우산 안에 서서 고개를 위로 꺾어 들면 빗속에 온전히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빗방울이 우산에 닿았다가 곡면을 타고 또르르르 굴러 떨어지는 모습이 보이고, 우산에 빗방울이 닿을 때마다 토독 토독 소리도 더 크게 울렸다. 그 안에서만큼은 나도 온 감각으로 비를 즐길 수 있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난 가족을 포함한 타인 앞에서 비에 대한 마음을 드러내진 않았다. 역시 조용히 투명 우산을 손에 쥘 뿐이었다. 때론 우비를 쓰고 숲 속을 걸었다. 사람들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신기해했다. 우산 밖으로 손을 뻗고, 물웅덩이에 살포시 발을 대보고, 풀숲 옆에서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내 모습을 보며 "비 좋아하는 사람은 처음 봐요."라 말했다. 하기야, 비만 오면 이리도 마음이 관대 해지며 어린아이가 되는 나를 보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좋아하는 마음은 역시 숨길 수가 없는 거였다.


지금은 개인택시를 하는 아빠는 비교적 도로 위에서 자유로워졌다. 비나 눈이 내릴 때면 옆구리에 뚱뚱한 맥주를 끼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럼 엄마는 간단히 안주상을 차리고 가족들은 상을 둘러앉는다. 아빠는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한 후 창밖을 보며 “이야, 허허. 엄청 쏟아지네!”하고 감탄한다. 그럼 난 창가에 서서 또 비 냄새를 음미한다. 오랜 시간 내 마음에서 자라온 죄책감도 이렇게 그와 같은 창을 바라볼 때만큼은 몸집이 작아진다.


작년 12월, 첫 함박눈이 내린 날이었다. 아빠는 그날도 일을 일찍 마쳤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가족끼리 비나 눈을 즐긴 기억은 없는 것 같았다. 내친김에 가족들에게 “눈 맞으러 나갈 사람~”하고 외쳤다. 엄마와 남동생이 채비하고 따라 나왔다. 하얀 세상 속에서 엄마는 눈 쌓인 나뭇가지를 툭 건드리고, 작은 눈덩이를 만들어 이리로 저리로 던지며 꺄르르 웃었다. 소녀가 된 엄마를 보며 난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엄마도 원래 눈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닐까?'하고. 언젠가 아빠가 운전대로부터 은퇴하게 되면 ‘혹시 아빠도 원래 비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닐까?’하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행궁동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