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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씨 Jan 13. 2024

보물단지이자 애물단지인 그것은

버리지 못한 17년 치 다이어리

내 방 책상 맨 아래 칸에는 보물단지이자 애물단지인 무엇이 있다. 다름 아닌 17년 치 다이어리다. 중학생 때부터 하루하루를 기록해 온 지도 꼬박 17년이 됐다. 치열하게 공부하던 중·고등학생 때는 데일리 스터디 플래너를 썼고, 각종 동아리와 아르바이트, 공모전과 대외활동으로 일정이 빠듯하던 대학생 때는 위클리 다이어리를 주로 썼다. 직장인이 된 이후부터는 아예 일기장을 쓰고 있다. 처한 상황에 따라 포맷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나에게 주어진 하루치의 공백에 매일의 일정과 생각, 감정들을 적어온 건 변함이 없다.


언젠가 이사를 할 때였다. 이삿짐을 정리하기 위해 방을 둘러보는데 다이어리 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버릴 것과 새 집으로 가지고 갈 것들을 분류하던 차였다. 17년 치 다이어리도 잔존가치를 따져볼 필요가 있었다. 한 해씩 역행하며 다이어리를 읽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정말이지 온갖 것들이 적혀있었다. 가령 첫사랑의 설렘이라든가 첫 이별의 처절함 같은 것들. 지금은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 17년의 긴 시간이 물성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다이어리 보따리는 꽤 큰 짐이었지만 그걸 버리는 건 어쩐지 내 인생 절반을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다이어리는 새 집으로 거처를 옮겨 책상 맨 아래 칸에 자리를 잡았다.


일단 가지고 오긴 했지만 여전히 이게 참 애물단지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안에 나의 못난 생각이나 감정, 치부 같은 것들이 왕왕 적혀 있기 때문이다. 무능력한 부장이 떠나버렸으면 좋겠다든가, 나로선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낸 동기가 너무 얄밉고 부럽다든가. 원망과 저주, 열등감 같은 마음들이 날 것으로 가감 없이 적혀있다. 직접 전할 수 없는 말들도 종이에 한가득 남아있다. 겉으로는 언제나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왔지만, 답답한 마음에 온갖 상황들을 복기하며 적은 일기들로만 책 한 권은 나올 수준이다. 글이든 말이든 일단 내뱉고 나면 괜찮아지고 마는 게 사람의 마음인지라, 나는 매번 일기를 쓰며 마음의 응어리를 풀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다이어리가 나의 해우소인 셈이다. 그게 자그마치 17년이니 똥통을 안고 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럼에도 그 보따리를 왜 내다 버리지 못하느냐 묻는다면 그것도 나름 이유가 있다.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좋은 순간들도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특정 단어를 보고 관련 기억이 생생히 떠오르는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이 연장선상에서 다이어리에 적힌 단어들은 온통 다 기억의 트리거가 된다. 할머니께 카네이션을 선물해 드렸던 어느 어버이날, 할머니가 고맙다며 꼬옥 안아주셨는데 그게 그렇게 행복했다. 그 순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일기장 말미에 #할머니 #카네이션 #포옹 이라고 써두었는데 다시 읽을 때마다 그날 저녁의 풍경이 몽글몽글 떠오른다. 21세기 기술로도 붙잡아 둘 수 없는 감각들, 어떤 날의 분위기라든가, 냄새, 촉감 같은 게 있다. 다이어리를 읽으면 그 감각들이 추체험이 된다. 애물단지가 제법 보물단지 같아지는 순간이다.


직장인이 된 이후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같은 자리에 앉아 8시간씩 일하는 삶을 살고 있다. 좋게 말하면 안정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지루하다. 일상이 한껏 납작해졌다는 생각이 든 어느 날, 다이어리에서 일기장으로 포맷을 바꿨다. 하루를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밀히 들여다본 일상은 정말로 반복뿐인가? 그렇지 않다. 매일 아침 몸무게와 출근길 지하철의 밀도와 점심메뉴, 동료들과의 관계, 요가할 때의 몸 컨디션이 다 다르다. 그에 따라 나의 생각과 기분, 감정 또한 다 다르다. 정성스럽게 보낸 하루들을 모아놓고 보면 꼭 변주되는 음악 같다. 하루하루가 똑같아 보이지만, 결코 완전히 똑같은 하루는 없다는 것. 매일 새로운 해가 뜬다는 그 진부한 진리를 잊지 않고자 나는 일기를 쓴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일기를 써나갈 것 같다. 쓰지 않는 삶보다 쓰고 기억하는 삶이, 조금 더 풍요로울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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