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쓸 수 있는 글이 분명 있을 테니까
역사의 초고를 쓰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시절이 있었다.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기자가 되고 싶었다. 역사의 초고라 불릴 만큼 대단한 기사를 쓰는 사람, 그로 인해 세상을 바꾸는 사람, 언젠가 태블릿 PC를 주웠던 김 모 기자만큼이나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취업 준비 기간이 길어지고 ‘장수생’으로 분류되면서부터, 견고했던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제풀에 지친 탓이 컸다. 그즈음 어떤 책에서 이런 구절을 봤다. 영화를 하고 싶으면 영화를 ‘하면’ 되는데 사람들은 영화감독이 ‘되려’ 한다고. 하다와 되다를 혼동하고 있다고.(혼자서 완전하게, 이숙명) 내 경우로 치환을 했다. 나 또한 하다와 되다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글을 써서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글을 쓰면 될 일이었다. 기자가 아니어도 될 것 같다는, 대안적인 삶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꼭 기자여야 한다’는 믿음으로 독하게 덤벼도 될까 말까인 언시판에서 ‘굳이 기자여야 하나?’라는 의구심은 약이기보단 독이었다.
내 꿈은 왜 작가가 아닌 기자였을까. 기자에게 기대하는 역할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내 경우엔 ‘기록자’로서의 기자에 매력을 느꼈다. 그 시절 적었던 자기소개서에도 그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기록자로서의 내 장점을 어필하고, 기록자로서의 기자를 예찬했다.
그럼 나는 왜 기록자가 되고 싶었을까. 그것은 기록하는 사람만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기억하는 사람만이 글을 쓰기 때문이다. 뉴스 자막 25자 안에 적힌 사상자 또는 사망자 숫자 뒤에, 사람이 있다는 걸 기억하고 싶었다. 어떤 죽음들을 잊지 말자고, 어떤 목소리는 다 같이 기억하자고. 잊지 말고 기억해서 이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보자고. 대중에게, 시청자와 독자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나는 힘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강하니까.
이로써 조금은 더 따뜻한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미움과 증오가 옅어진 세상. 내가 돈 한 푼 없고 직업이 없어도, 불의의 사고로 건강을 잃어도,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세상. ‘우리’라는 말이 오그라드는 단어로 분류되지 않는 세상을 꿈꿨다. 이게 얼마나 순진무구하고 나이브한 생각인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러고 싶었다. 손쉬운 냉소나 비관보단 어려운 희망을 택하고 싶었다.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시 지금, 여기로 돌아와 생각해본다. 나는 소위 언론고시라 불리는 언론사 입사 준비를 그만두었다. 그토록 염원하던 기자라는 호칭 대신, 하루 8시간 이상을 주임으로 불리며 산다. 기자 되기를 그만두면서, 내 꿈도 이대로 끝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자세를 바로 앉으며 생각을 고쳐먹어 본다. ‘되다’를 버리고 ‘하다’를 택한다. 내겐 글을 쓸 수 있는 도구가 있고, 세상엔 글을 내어 보일 플랫폼이 많다. 아무개 주임으로서, 두 발 붙이고 선 이 자리에서 내가 쓸 수 있는 글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 가능성을 믿으며 첫 글을 쓴다. 그리고 다짐한다. “언제나 끝까지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글 쓰는 사람들(밤은 선생이다, 황현산)”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