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일한 대가가 감사와 지적이라면
“공공기관 오래 다니면 자존감 떨어져요, 멘탈 관리 잘해야 해”
신입사원 시절, 부서에 일 잘한다고 소문난 선배가 있었다. 선배는 갓 입사한 나와 동기에게 우스갯소리로 자존감을 잘 지키라고 이야기했다. 궁금했다. 여기 다니는데 자존감이 왜 떨어질까. 유명한 대기업이 아니어서? 월급이 귀여워서? 이런 이유라면 내 자존감은 더 다칠 일이 없었다. 장기간의 취업 준비로 이미 바닥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서울에 나 앉을 자리가 생겼다는 사실만으로 날아갈 듯 기뻤던 때다. 소속감에 한껏 취해있는데 공공기관 직원이라 자존감이 떨어진다니. 이유를 듣지 못한 채 선배는 다른 부서로 떠났고, 선배의 말만 마음 한구석에 남았다.
“땡 주임, 잠깐 이리 와보게”
이제 막 출근해서 가방을 벗으려던 참이었다. 부장님께서 나를 급히 불렀다. 모니터 화면엔 기사가 띄워져 있었다. 어느 의원실에서 보도자료를 배포한 모양이다. 기사는 우리 기관에서 제작지원하여 만든 특수 목적의 방송프로그램이 ‘하나 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지적받은 해당 프로그램은 매년 28여 편씩 제작해오던 콘텐츠였다.
의원실 주장의 요지
“너네 왜 ‘놀면 뭐하니(예시)’ 하나 밖에 안 만드냐?”
당황스러운 나
“엥? 그건 그냥 프로그램 이름이고… 출연자, 주제, 내용, 포멧 다 다르게 100편 넘게 만들어왔는데…?”
이런 날이면 다른 일은 올-스톱이다. 기사 대응에 전력을 쏟았다. 답변 자료를 만드는데 뉘앙스가 흡사 해명문이다. 당황스러움과 억울함이 스물스물 기어올라왔다. 관점에 따라 의원실 주장도 일부 사실이었다. 프로그램이 하나인 건 맞으니까. 그렇지만 그 프로그램명은 해당 콘텐츠들을 총칭하기 위한 하나의 이름일 뿐, 그 안에는 주제와 형식이 다양한, 특정 시청자를 위한 콘텐츠가 여러 편 있었다. 제작진부터 자문위원들까지 유독 열의를 갖고 진행해오던 사업이었다. 한 편 한 편에 들인 정성은 외면한 채 프로그램이 하나라서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 같아 속상했다. 의원실은 그렇다 치고 기자님은 왜 크로스체크를 안 했을까. 애꿎은 기자 친구들에게 아쉬움을 토로하며 마음을 달랬다.
이런 식의 질의응답이 왕왕 있다. 작년 기준으로 추산해보니 연간 80여 건 정도 된다.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매달 여섯번 씩 누군가로부터 혼이 나는 셈이다. 의원실이나 감사 주체로부터 자료 요청이 오면, 답변자료 만드는 일이 무조건 1순위 업무가 된다. 국고를 쓰는 공공기관이니 여러 사람으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게 어느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공공기관에 대한 요즘의 국민감정을 고려하면 지금보다 더 의심받아도 유구무언이다.
문제는 억울할 때다. 지적을 위한 지적, 감사를 위한 감사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럴 때면 옛날 드라마 <대장금>의 명대사가 떠오르곤 한다. ‘홍시맛이 났는데, 어찌 홍시라 생각했느냐 하시면, 그냥 홍시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이온데…’ 해야 해서 한 일, 써야 해서 쓴 돈이 죄다 소명 거리라니. 의원실 요구자료에, 느닷없이 보도된 기사, 양식만 달라진 채 똑같은 내용을 되묻는 감사자료에 대답하다 보면 좋은 일하고도 하루종일 해명만 하는 것 같아 사기가 꺾인다. 어른들에게 자주 혼나는 어린아이가 된 듯 움츠러든다. 문득 선배가 해준 말이 떠오른다. 아, 이래서 자존감 잘 지키라고 했던 거구나.
흔히들 공공 조직이 보수적이고 방어적이라고 한다. 어언 햇수로 3년 차가 되니 왜 그렇게 되는지 메커니즘은 알겠다. 무언가를 더 한다는 건, 극단적으로 말해서 지적받을 일을 늘리는 꼴이다. 예컨대 홍보 영상을 만들고 싶다고 치자. 내가 직접 만들면 예산대신 내 노동력이 투입되니 행정적으로 남는 흔적이 없다. 만드느라 야근을 했다면 시간외근무 근태 문서 정도 남을까. 영상 퀄리티는 낮겠지만 외부로부터 지적받을 위험도 적다. 영상 퀄리티를 높이고자 영상 제작 용역을 발주 낸다면? 감사 대상 계약 건 추가다. 아무 것도 안하면? 영상도 없고 리스크도 없다. 이곳에선 해온 방식대로 해야 탈이 안 난다. 열심히 일한 대가가 감사와 지적이라면 아아, 적극 행정이란 얼마나 요원한가.
모두 역할대로 한다는 거 안다. 질의하는 사람, 감사하는 사람, 평가하는 사람 모두 자기가 맡은 바를 충실히 할 뿐이다. 어떤 지적은 각성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때문에 의심하고 질문하는 게 업인 사람을 원망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들도 조금만 더 고민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사업 목적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거나 사업 수혜대상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지적을 받으면 정말이지 힘이 빠진다. 하기야 나도 남의 일에 관심이 없으니까, 남들이 내 일과 내 진심에 관심 없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테지. 그렇다면 방법은 지적받을 거리를 줄이는 걸까. 내 자존감을 지키는 방향이 이른바 소극 행정이라면 그것도 썩 내키진 않는다. 열심과 무기력 사이에서 휘청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