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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요나 Apr 16. 2019

기독교와 부활절의 의미

While We Were Still Sinners


로마 종교의 변화와 기독교
 
로마인은 오랫동안 인격화되지 않은 여러 정령들을 숭배하고 있었다. 로마제국이 형성되면서 유력한 부족신과 지방신이 국가적인 신으로서 받들어 모셔지게 되었고, 로마의 신은 점차 그리스의 신과 동일시되었다. 유피테르는 제우스와, 마르스는 아레스와, 넵투누스는 포세이돈과 같은 신으로 여겨졌고, 동일시된 그리스 신의 신화와 속성도 이어받게 되었다.


최초의 기독교 박해는 기원후 64년 네로 시대에 로마 대화재의 주범으로 기독교도를 수색하면서 잔인한 고문과 태형을 가한 것이었다. 데시우스 황제(Dezius 249~251)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Diokletianus 284~305) 시대에 기독교 박해는 극에 달했다.
데시우스 황제는 처음으로 대대적인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가했는데, 정부의 주도하에 조직적으로 전국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는 제국이 윤리적으로 붕괴되고 정치적으로 부패되었다고 판단하고, 과거의 전통과 종교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전 제국에 퍼져가고 있는 기독교를 박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데시우스의 대대적인 탄압은 서기 251년 그가 고트 족에게 살해되면서 줄어들었으나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다시 모든 교회를 파괴하고, 성서는 모두 불사를 것을 명령했다. 그는 또한 기독교를 고집하는 자는 그 지위를 격하시키고, 자유를 박탈하라고 명했다.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망 후에도 계속 이어지다가, 서기 313년 신앙의 자유를 묵인한다는 밀라노 칙령이 발표된 후에야 누그러졌다.


콘스탄티누스 1세 이후로 기독교는 로마 정부의 지원을 받았으며,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그리고 기원후 391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칙령으로 기독교는 로마 국교가 되었으며, 로마제국 내에서 기독교 외의 모든 종교 숭배가 금지되었다.
 
부활절의 역사와 풍습
 
부활절(復活節, Easter)은 예수의 부활을 찬양하기 위하여 325년 니케아공의회(Concilium Nicaenum Primum)에서 매년 춘분(春分)이 지난 첫 만월(滿月) 직후의 일요일로 지정하였다.
부활절의 중심 주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승천 및 성령하강이기 때문에, 부활절을 전후로 사순절(四旬節: 예수가 세례를 받은 뒤 40일 동안 황야에서 금식을 하고 사탄의 유혹을 받으며 보낸 기간을 기념하는 날), 성주일(聖週日, 고난주일), 부활절기로 이루어져 있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이스라엘 민족은 야곱의 아들 요셉에 의해 이집트에 정착했다. 하지만 이들은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게 되었고 모세의 청에도 불구하고 파라오는 이스라엘 민족을 풀어주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을 내렸다. 첫 번째 나일강이 피로 변하고, 두 번째 개구리가 들끓고, 세 번째 먼지가 이가 되며, 네 번째 파리 떼가 몰려오고, 다섯 번째 가축들이 역병에 걸리고, 여섯 번째 사람들의 몸에 종기가 나고, 일곱 번째 큰 우박이 내리고, 여덟 번째 메뚜기 떼가 날아오고, 아홉 번째 햇빛이 사라지는 커다란 재앙이 연이어 내렸지만 파라오는 여전히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이 내렸는데, 사람이든 가축이든 처음 태어난 장자는 모두 죽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세의 지시를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 이 재앙을 피했다. 자신의 큰아들을 비롯해 모든 이집트의 장자들이 죽자 파라오는 이스라엘 민족을 풀어주었다. 이때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이스라엘 인들의 집에는 재앙이 내리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고 하여, 이를 지나치다 또는 그냥 넘어간다는 뜻의 히브리어 ‘페사흐(פסח, Pessah, Passover)’이라고 하여 유월절(逾越節)로 기념하였고, 이때 급하게 이집트를 떠나오느라 발효되지 않은 빵을 구워서 먹은 것이 유월절 만찬의 시작이었다.


2천 년 전 예수도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을 찾았다. 그리고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가졌는데, 이것이 유명한 ‘최후의 만찬’이다. 최후의 만찬이 끝난 뒤 예수는 체포되고 처형됐다. 유월절 기간 동안 예수가 처형되고 부활했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유월절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으며, 예수를 ‘신의 어린 양’, ‘유월절 어린 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중세에는 사순절 동안 가톨릭 신자들 특히 수도승들은 짐승 고기뿐만 아니라 물고기나 달걀까지도 먹지 않고, 빵과 마른 채소로 식사를 하는 금욕 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는 달걀이 귀해서 부유층만 먹을 수 있었고, 대부분의 신도들은 부활절 아침 식사 때에야 비로소 달걀 요리를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웃과 달걀을 선물로 주고받는 부활절 풍습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유럽에서는 부활절 아침 해뜨기 전에 동네 들녘에 모여 춤을 추고 노래하며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한다. 또한 부활절 예배 때 세례 받는 사람들은 죄사함을 받고 정결하게 되었음을 기념하여 흰옷을 입는다. 부활절이 유월절의 연장이라는 생각에서 어린 양을 먹는 풍습도 있다.

독일에서는 15-16세기경부터 계란 대신 흰 토끼를 부활의 상징물로 사용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부활절 기간에 피는 버뮤다 백합을 ‘부활절 백합’으로 부르며 제단을 꾸미는 등 여러 가지 부활절 풍습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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