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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중해 홀릭 Feb 20. 2021

미쓰비시 재벌 탄생의 추악한 비밀

사카모토 료마 살해, 미쓰비시 탄생의 초석이 되다!

지금은 시중에서 일본 맥주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됐지만, 한 때는 일본 맥주를 참 많이 마시던 시절이 있었다. 아베 전 총리의 무모한 경제보복 조치 이후, 일본 제품 불매운동의 여파로 넘쳐나던 일본 맥주들은 이제 대형 마트의 구석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엄청나던 맥주 점유량도 뚝 떨어졌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 맥주 수입은 그치지 않고 있다.


관세청 등에 따르면 2020년 일본 맥주 수입액은 전년 대비 85.7% 급감한 566만8000달러(약 64억원)를 기록했다. 2018년 7830만달러(약 880억원)에서 2019년 3975만6000달러(약 447억원)으로 반토막난 뒤 지난해 들어 다시 7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든 것이다. 880억원 → 447억원 → 64억원 → ?. 

기린 맥주

이같은 추이에 따라 기린 맥주와 함께 국내 수입 일본 맥주의 양대 주축이었던 아사히 맥주의 국내 철수설이 나오고 있다. 롯데아사히주류가 이달부터 전 임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고 있기 때문에 철수설은 더 굳어지고 있다. 이번 희망퇴직은 지난해 5월 한차례 희망퇴직을 실시한 이후 약 9개월 만에 또 이뤄지는 것이다. 롯데아사히는 롯데칠성음료와 일본 아사히그룹홀딩스가 지분 50%씩 보유한 법인이다.


아사히와 함께 많은 매출고를 기록하던 것은 기린 맥주다. 많은 분들이 알고 있겠지만, 기린 맥주를 만드는 기린홀딩스는 미쓰비시(三菱) 재벌 계열사다. 전범기업으로 우리나라에 못된 짓을 정말 많이 저질렀던 미쓰비시는 최근 "위안부 피해자를 매춘부"라고 주장한 하버드대 램지어 교수의 망발 때문에 다시 주목을 받았다.


램지어 교수의 공식 직함은 '미쓰비시 일본 법학 교수'다. 1970년대에 미쓰비시는 하버드에 그때 돈으로 100만 달러를 기부하며 일본을 연구하는 석좌교수 자리를 따냈고 1998년엔 이 자리가 정식 교수로 승격됐다. 바로 그 첫 수혜자가 램지어다. 그가 왜 저런 논문(논문이라고 하기엔 너무 허접한 잡문이지만)을 썼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대목이다.


JTBC보도에 따르면 1972년 9월 미쓰비시 사장은 하버드대 총장에게 서한을 보낸다. 이 편지에는 "일본의 법체계 발전 연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면서 "이례적인 선물을 받아주면 좋겠다"는 제안이 담겼다. 100만 달러 기부는 그런 전통이 없던 당시 일본 기업으로선 파격적이었고, 당시 뉴욕타임스에도 보도됐다. 이후 방문 학자가 미쓰비시 석좌교수를 번갈아 맡아오다 1998년 정식 교수직으로 승격되어 램지어 그 첫 수혜자가 됐고, 20여 년이 지나 일본 우익의 논리를 대변하는 논문과 인터뷰가 잇따라 나오게 된 것이다.


미쓰비는 첫 기부 직후 다시 200만 달러를 기부했다. 그리하여 1년 반 동안 모두 300만 달러, 미국 정부에서 쓰는 보수적인 CPI 측정법으로 환산해도 200억 원이 넘는 거액이 하버드대에 들어갔다. 1980년대에도 무려 1억 달러 가까이 더 투입되었는데, 지금은 기부금 현황을 공개하지 않은 걸 감안하면 이 지원은 지금도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미쓰비시는 그들의 돈으로 미국에 자신들의 간첩을 심어서 국제 여론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조성하고 있다. 미쓰비시가 국내 최대의 김&장 로펌을 매수해 일본 강제징용자 피해보상을 무산시키려 사법농단 사태까지 배후 조정한 사실을 상기하면 사실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 (일본 정부가 이 문제를 위해) 700억엔인가 미국에 재정을 쏟는다고 들었어요. 교과서 로비에 쓰고, 특별기금을 조성해 램지어 같은 교수직도 따로 만들고…" (마이크 혼다/ 전 미국 연방 하원의원)


그러니 따지고 보면  그동안 우리가 일본 맥주를 사서 마신 그 돈이, 우리에 대한 일본의 범죄를 정당화하는 로비 자금으로 쓰였던 것이다.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럼 미쓰비시는 왜 맥주 회사 이름을 '기린'이라고 지었을까. 기린(麒麟)은 중국의 전설 속에 존재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수컷은 기(麒), 암컷은 린(麟)이라고 해서 '기린'이다. 용의 머리에 사슴의 몸에 소의 꼬리와 말과 같은 발굽과 갈기가 있으며, 린(麟)은 이마에 뿔 하나가 나지만 기(麒)는 뿔이 없다고 한다. 이런 기린을 동양에서는 성스러운 동물로 여겼다.


미쓰비시가 맥주 이름에 '기린'을 붙인 것이 아무런 연관성 없는 우연이었을까?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린과 미쓰비시 재벌의 탄생 뒤에는 추악한 비밀이 도사리고 있다.


미쓰비시를 만든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弥太郎, 1835-1885)는 지금의 시코쿠(四国)  고치 현(高知県) 아키 시(安芸市)에서 지하낭인(地下浪人·치게료닌)의 아들로 태어났다. ‘지하낭인’이란 하급무사인 향사(郷士)가 가난 때문에 향사의 권리를 상인이나 농민에게 넘긴 사람들을 말한다. 이런 경우 번청에서 역할도 주어지지 않고 당연히 녹봉도 없지만, 향사로서의 신분만큼은 유지되었고 칼을 차는 행위도 용서되었다. 이들은 무사 신분이지만 농사를 짓거나 상업 활동으로 생계를 잇기도 했다.

사카모토 료마 암살의 최대 수혜자는 오늘날 미쓰비시(三菱) 재벌을 만든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弥太郎)였다. 그의 고향 고치 현(高知県) 아키 시(安芸市) 생가에 세워진 동상.


집이 매우 가난했기 때문인지 어려서부터 도둑질을 하는 등 이와사키의 행실은 매우 나빴고, 그로 인해 여러 차례 감옥을 다녀왔다. 1854년 스무 살 때 번 관리의 수행원으로 에도(江戶, 도쿄의 옛 이름)에 가서 일종의 사립학교인 미야마주쿠(見山塾)에 들어갔지만, 그 다음해에 아버지가 술자리에서 촌장과의 싸움에 의해 투옥된 것을 알고 귀향했다. 그는 관청에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증인이 촌장 편을 들자 ‘비리가 산처럼 솟아 있는 부교소(奉行所)인가’라며, 벽에 ‘관(官)은 뇌물을 받고, 소송은 애증에 의해 결정된다’고 크게 썼다가 투옥되었다. 이 때 감옥에서 산술과 상법을 배운 것이 나중 상업의 길로 나가게 되는 기연이 되었다.


그러다 25세 때 운 좋게 당시 칩거 중이던 요시다 도요(吉田東洋)*의 문하생이 되어 요시다의 조카인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郞)**와 친하게 되었다. 요시다 도요가 참정(参政)이 되자, 그도 기회를 얻어 청나라의 동향을 살피는 목적으로 나가사키에 파견되었다. 그는 영국인과 네덜란드인 등 외국인의 통역을 하다가 사창가인 마루야마 화류계(丸山花街)에서 난봉질로 번의 공금을 낭비하고 사사로이 사용하다가 그나마도 떨어지자 무단으로 귀국함으로써 파면되어 관직을 잃었다. 그러나 감옥에 여러 번 갔다 온 그에게 그 정도는 경력이 약간 긁히는 정도의 일밖에 되지 않았다. 

이와사키가 재벌로 성장하는 데 최대의 도움을 준  고토 쇼지로.

* 요시다 도요(1816-1862) : 도사 번의 참정(参政)으로 문벌 타파, 식산 흥업, 군제 개편, 개국 무역 등 부국강병을 목적으로 한 여러 혁신적인 개혁을 수행했다.

** 고토 쇼지로(1838-1897) : 도사번주(主) 야마노우치 도요노부(信)의 신하이자 요시다 도요의 조카로서 도사 번의 무역회사인 개성관(開成館·카이세이칸)을 나가사키에 만들었다. 이후 대정봉환운동을 실현시켰고, 메이지유신 후 원로원부의장·체신상·농상상 등을 지냈다. 조선의 개화당을 지원하여 청국세력을 축출하는 데 관여하였으며, 만년에는 대한제국 정부의 고문을 맡아 한반도 강점의 토대를 마련했다.  


1862년 요시다 도요가 도사근왕당 무리에게 암살되자, 이와사키는 범인을 잡기 위해 영주의 참근교대(参勤交代, 산킨코타이)***에 동행하는 형태로 오사카로 가지만, 존왕양이파가 득세한 당시 게이한(京坂)에서 체포 업무가 어려워지자 임무를 포기하고 다시 제멋대로 무단 귀국했다.

*** 참근교대 :  각 번의 다이묘를 정기적으로 에도를 오고 가게 함으로써 각 번에 재정적 부담을 가하고, 볼모를 잡아두기 위한 에도 막부의 제도. 이에 따라 각 번은 도쿠가와가에 반기를 들기가 매우 힘들어졌고, 도쿠가와 가문이 15대에 걸쳐 번영을 누리는 요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운이 매우 좋았다. 1867년 요시다 문하에서 같이 공부했던 후쿠오카 다카치카(福岡孝弟, 1835-1919)가 야마우치 영주의 명령으로 개성관(開成館) 업무를 위해 나가사키로 갈 때, 다카치카의 요청으로 이와사키도 나가사키를 가는 행운을 또 잡았다. 당시 도사 번은 개성관 나가사키상회를 통해 선박과 무기를 수입하거나, 녹나무(화약 원료)와 가쓰오 부시 등 번의 물산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토 쇼지로가 이와사키를 상회 지배인으로 임명하고, 이와사키는 이를 통해 나가사키의 무기상으로 조슈 번, 사쓰마 번, 사가 번에 무기를 독점적으로 공급하던  토마스 글로버(Thomas Blake Glover , 1838--1911)****와 협력하면서 친교를 쌓게 되었다. 그런 와중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6-1867)가 11월 15일 교토에서 살해되는 일이 벌어지자, 고토 쇼지로는 료마가 만든 해원대(海援隊·가이엔다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이름도 ‘도사상회(土佐商会)’로 바꾸어  그 운영 책임을 이와사키에게 맡겨버렸다. 그리하여 어려서부터 손버릇이 나쁘고 성품이 나빴던 이와사키는 인생 최대의 행운을 잡게 되는 것이다. 

**** 메이지 유신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글로버의 활약(?), 그의 얼굴마담으로 지낸 사카모토 료마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필자의 책 <메이지 유신이 조선에 묻다> 참조.

***** 해원대 : 사쓰마 번이 글로버와의 무기 거래를 위해 료마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만든 ‘카메야마샤추(亀山社中)’가 메이지 유신 성공으로 더 이상 필요없게 되고 존속이 어렵게 되자, 료마가 이를 대신해 세운 사업체. 그러나 글로버나 사쓰마 번이 지원이 없어서 이 회사는 당연히 매출이 좋지 않아서, 당시 나가사키상회 지배인 으로 있던 이와사키 야타로는 “돈에 무지한 상태로 자꾸 오는 해원대 대원은 골칫덩어리”라고 일기에 적고 있다.

카메야마샤추는 계단을 백여 개 이상 올라가야 하는 언덕 외진 곳 협소한 장소에 있다.  ‘페이퍼 컴패니(paper company)’ 비슷했으므로 좋은 장소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


메이지 유신 성공 이후 고토 쇼지로와 이와사키 두 사람의 긴밀한 이익 공동체가 형성됐다. 그들은 공사를 넘나드는 내부자 거래를 반복하며 번의 회사를 개인적인 이익을 채우는데 적극 활용했다. 당연히 평판이 나빴지만 자본의 힘은 으레 그런 약점을 덮어주었다. 유신 정부가 전국을 통일하는 화폐 개혁에 나섰을 때, 각 번이 발행했던 번찰(藩札)을 신정부가 매점하는 사실을 사전에 파악한 이와사키는 십만 냥의 자금으로 대량의 번찰을 미리 사들여 그것을 신정부가 매입하게 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이 정보를 그에게 흘려 이익을 나눠가진 사람은 당연히 고토 쇼지로였다. 


이처럼 돈과 정보를 손에 쥐게 된 이와사키는 결국 해원대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또한 유신 이후 각 번이 무기대금을 갚을 능력이 없어지면서 파산하게 된 글로버가 소유한 다카시마(高島)탄광 역시 훔치는 기술에 능한 이와사키에게 관영사업 매각의 형태로 또 넘어갔다. 이와사키의 미쓰비시 재벌이 바로 이렇게 해서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니 미쓰비시 재벌의 발판은 바로 사카모토 료마의 해원대, 그리고 료마를 하수인으로 부렸던 글로버의 탄광이었다.


다카시마 탄광은 1695년에 처음 석탄이 발견되었고, 글로버는 1869년부터 외국인 기술자를 고용하여 석탄을 채굴했다. 미쓰비시는 1881년 이 탄광을 인수해 본래 3개의 작은 섬이었던 다카시마의 물길을 메워서 둘레 6.4km의 큰 섬으로 만들어 근대적 탄광으로 개발했다. 다카시마 탄광에서 채굴된 양질의 석탄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군수물자를 만드는 각종 무기 공장과 군함 등의 원료로 사용되었다. 다카시마 탄광은 인근에 있는 악명 높은 일명 군함도, 하시마(端島)보다 더 큰 해저 탄광으로 전성기에는 약 1만8천 여 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 나가사키 현에는 강제 징용으로 끌려온 사람을 포함해 약 7만 5천여 명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나가사키 시에만 2만 여 명이 있었고, 그 중 절반 정도가 미쓰비시에서 일했다.

우리 조상들이 강제로 끌려가서 노역을 해야 했던 다카시마 탄광.

고토 쇼지로와 이와사키 야타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더구나 고토는 사쓰마와 조슈 두 번과 연계된 료마가 화려하게 두드러지는 사실 자체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료마는 이런 고토 쇼지로에게 의탁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 했다. 

게다가 료마가 공무합체파와 기울어지면서 사쓰마와 글로버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특히 사쓰마 번은 자신들이 주도해 만든 카메야마샤추의 얼굴마담 료마가 그 경험을 발판 삼아 이번에는 도사 번에서 수출 담당 회사를 맡아 경쟁상대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것이 마뜩찮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파이에서 도사 번 몫이 늘어나면, 이는 곧 사쓰마의 이익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결국 료마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쓰마와 글로버의 이익에 해가 되는 존재가 돼버렸다.  

그의 고향 앞 바다를 바라보는 사카모토 료마 동상.

이 모든 대목을 종합해볼 때, 료마가 사라지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존재들은 분명해진다. 사쓰마와 조슈, 글로버, 그리고 고토와 이와사키가 그들이다. 따라서 이들이 료마를 지우기 위한 음모에 가담해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대부분 기획살인 범죄는 그의 죽음으로 이익을 얻게 되는 사람들이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들 모두의 공동기획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료마가 암살당한 후에 글로버는 이와사키와 매우 밀접한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었고, 글로버상회가 파산한 다음에는 미쓰비시의 고문으로 들어간다. 이 모든 게 단순한 우연일까? 

글로버(아랫줄 왼쪽에서 두 번째) 와 사업 파트너들. 그 옆 중앙 인물이 미쓰비시 재벌을 일군 이와사키 야타로 동생, 야노스케(岩崎彌之助)다.


료마로부터 물려받은 해원대의 해운 사업과 무기 거래는 세이난전쟁(西南戦争)과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미쓰비시의 ‘달러 박스 사업’이 되었다. 이와사키의 미쓰비시는 료마의 업적에 단물을 빨아먹을 빨대를 꽂았다. 미쓰비시는 미쓰이(三井)나 스미토모(住友)와 같은 전통의 재벌과 달리, 메이지유신의 혼잡한 과정에 정치인 및 군사산업과 밀착하여 생긴 엉터리 재벌이었다. 이웃 국가를 착취해 얻은 자본을 자신들 침략 행위를 정당화하는 로비 자금으로 사용하는 그런 엉터리 행각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분명한 점은 사카모토 료마가 살해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미쓰비시 재벌은 없었을 것이란 사실이다. 


일본 최초의 맥주 제조 공장은 노르웨이계 미국인 양조기술자 윌리엄 코플랜드(William Copeland, 1834-1902)가 1869년 요코하마 외국인 거류지에 설립한 ‘스프링 밸리 양조장’이다.  이 공장은 나중 파산하여 미쓰비시 고문 글로버가 자본금 5만 달러에 인수하여, ‘재팬 브루어리 컴패니(Japan Brewery Company)’를 설립했고, 이것이 바로 지금의 ‘기린맥주(麒麟麦酒)’다. 


자,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 이 회사의 심볼 마크가 왜 기린(麒麟)일까? 

기린 맥주 상표

기린은 영험한 동물로 재수를 가져준다는 속설이 있다. 따라서 이름을 지을 당시 해외의 맥주회사들이 동물 이름을 많이 차용했던 사실을 본따서 일본인들이 받아들이기 쉬운 명칭으로 도입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기린맥주의 실제 로고 디자인을 보면 말의 몸통에 용의 얼굴을 가진 그림이다. 즉,  용과 말이 합쳐진 료마(龍馬) 그림이 회사의 로고다. 지나친 확대 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맥주회사를 만든 글로버가 료마와의 추억의 한 자락을 회사 로고로 형상화한 것은 혹시 아닐까? 그에게 사죄하는 마음을 담아서 말이다.     


#메이지유신이_조선에묻다

#한일공동정부_메이지후예들의야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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