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우정의 핏빛 소나타
왕가위가 뭐 하는지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 그의 신작이 언제 나올지도 모르지만, 나온다 해도 딱히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다. 이미 그 정도면 충분히 보여준 것도 같다. 왕가위는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적 명감독이고 수많은 열혈팬을 가진 스타 감독이기도 하다. 한때 세계 영화계의 최전선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지금은 과거에 비해서는 많이 내려간 인상이 크지만, 그래도 왕가위는 여전히 왕가위일 것이다.
중국을 전공하면서 주전공 못지않게 파고든 것이 중국영화다. 좋아하는 중국영화, 감독, 배우들이 수도 없이 많아서 손에 꼽기 힘들다. 그래도 꼽아보라면 아무래도 젊은 시절 나를 강하게 매료시켰던 홍콩, 대만의 감독들을 먼저 들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서극, 오우삼, 왕가위, 후효현, 리안, 양덕창 같은 감독들 말이다. 그들의 대표작들만 열거해도 엄청난 리스트가 될 것이다. 그중에서 오늘은 왕가위의 데뷔작 <열혈남아: 원제는 몽콕하문>에 대해 좀 얘기해볼까 한다.
90년대 아시아 일대에서는 소위 왕가위 현상이 있었다. 그 열풍을 이끌었던 작품은 <중경삼림>, <타락천사>, <동사서독>, <해피투게더> 같은 영화들이었다. 감각적이고 세련된 미장센, 부유하고 방황하는 청춘들, 반환을 코 앞에 둔 홍콩의 불안하고 쓸쓸한 풍경, 이런 것들이 박자를 맞추며 커다란 공감을 이끌어냈다. 신선하고 짜릿하면서도 아릿햇다. 그의 영화들을 보는 느낌은. 낭만적 쓸쓸함이라고 할까, 얼마간의 퇴폐미도 있었고. 홍콩 반환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을 앞두고 있었다. 거기에 세기말의 공기가 더해져 더욱 그런 분위기를 내뿜었던 것도 같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왕가위의 모든 작품 중에서 데뷔작 <열혈남아>를 가장 좋아한다. 감정적 울림이 가장 컸고 공감치도 가장 높았다. 유덕화, 장학우, 장만옥, 만자량의 일생 일대의 연기를 뽑아냈다고도 생각한다. 당시 20대였던 그들은 이후 수없이 많은 영화들을 찍으며 톱스타로 성장했는데, 풋풋했던 청춘의 초상을 더없이 잘 표현해냈다. 말하자면 죽어도 같이 죽는 우정과 의리, 그리고 앞뒤 재지 않고 모든 것을 걸어버리는 사랑을 둘다 놓치지 않고 잘 살려내고 있다. 왕가위의 작품 중 유일하게 철저한 리얼리즘 기법에서 찍은 영화이기도 하고, 당시 범람하던 홍콩 느와르들, 조금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감정적 과잉으로 넘쳐나던 홍콩 느와르 속에서 아주 사실적이면서도 담백한, 완전히 결이 다른 느와르 수작이기도 하다.
란타우섬에서 건너 온 여자 장만옥, 야생마처럼 거칠게 홍콩의 뒷골목을 누비는 젊은 건달 유덕화, 대책없이 찌질하게 사고치고 막 나가는 골치덩이 동생이자 부하인 장학우, 그리고 유덕화패와 사사건건 각을 세우는 건달패 만자량, 그들이 펼쳐 보이는 뜨거운 이야기, 정도로 요약할수 있을까. <열혈남아>는 왕가위의 특기인 핸드핼드, 스탭프린팅, 슬로우 모션이 적절하게 활용되면서 뮤직비디오같은 감각적인 화면과 미장센을 선사한다.
결말이 다른 홍콩버전과 대만버전이 있다. 영화를 여러번 본 나는 홍콩버전을 더 좋아한다. 그 유명한 공중전화신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도 임억련이 카바한 베를린의 <Take My Breath Away>를 더 좋아한다. 사랑하는 여인 장만옥의 만류를 뿌리친 채 기어코 동생 장학우의 복수에 나섰다가 비극적 최후를 맞는 유덕화, 총을 맞고 쓰러지는 순간, 지난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가슴을 쿵치는 엔딩곡 <치심작부>가 흘러나온다. 유덕화가 직접 부른 노래다. 유덕화는 차가운 바닥에서 가쁜 숨을 헐떡이며 죽어간다. 그 비장미가 장난아니다.
인상적인 신이 너무나 많다. 란타우섬에서 홍콩을 오가는 페리호, 란타우 선착장 가의 공중전화 신, 홍콩의 어느 거리에서 떨어지는 비를 피하려 뛰어간 처마에서 만난 옛사랑과의 대화, 열받은 유덕화가 복수를 위해 달려나가는 장면 등등, 내 인생의 영화로 꼽는 만큼 좋아하는 장면이 너무나 많다. 왕가위의 많은 영화들을 다 좋아하지만, 나는 이 영화 <열혈남아>가 월등히 좋다. 36년 전 영화지만 지금의 어떤 영화와 비겨도 전혀 손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