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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노엘 Jan 07. 2019

botanical garden이 뭔지 알았더라면


누가 botanical garden에 가보잔다. botanical garden이 뭐야? 식물원이란다. 촌스럽고 무식해서 식물원이 영어로 뭔지도 몰랐다. 그런 것쯤이야, 모를 수도 있지. 뻔뻔한 얼굴과 당당한 태도로, 그리고 지루하게 뭔 식물원이냐, 약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Ho'omaluhia batanical garden으로 향했다. botanical garden이라는 곳에 발을 내딛는 순간. 암담했다.



내 머릿속에 그려지던 식물원은 좁디좁은 온실이었다. 건물 전체는 유리로 지어져 있다. 건물 안 좁은 길들을 따라가면 길 옆으로 빽빽하게 나무들이, 아니 나무라기보다는 크고 작은 화분들이 아무런 감흥 없이 줄지어 서 있는 곳. 숨 막힐 듯 습하고 끈적이는 더위 때문에 빨리 밖으로 나가 상쾌한 공기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한 '닫힌' 공간.  



그 닫힌 공간에 넓고 넓은 호수가 들어갈 줄이야.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콩알 정도의 작은 크기로 만들어 버리는 거대한 나무들이 식물원 안에 살고 있다니. 마음껏 구르고 싶은 탁 트인 들판을 볼 수도 있구나, botanical garden에서는. 아이들은 공도 없이 달리고 달리면서 청량한 숨을 힘껏 터트린다. 누군가는 커다란 나무 아래서 동화 같은 낮잠을 곤히 잔다. 휘파람을 불며 낚싯대를 어깨에 메고 가는 가족들의 표정이 한껏 들떠 있다. 아이들과 함께 나온 가족들의 뒷모습은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하다.



음, 그런데 왜 내 머릿속에서는 식물원이 답답한 온실로 그려지는 거지?

외국에 나와 보니 내가 참 촌스럽고 무지하고 아는 게 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뼈 아픈 통증이 느닷없이 내 뒤통수를 세게 내리칠 때가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식물원에 온 오늘처럼. 우물 안 개구리라는 속담은 나를 콕 집어서 빗댄 말이다. 하와이에 온 후, 내 머릿속에 저장돼 있던 정답들은 꽤 많은 분량이 오답으로 뒤바뀌고 있다.  



이래서 많이 다녀보라고 하는 건가. 한국에서도, 서울에서만,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해 30분이 채 넘지 않는 좁은 반경에서만 생활하기를 좋아하던 나는 딱 그만큼만 알고 있는 걸까. 그래서 내 머릿속 정답들은 사실은 빈약한 경험에서 도출된 한심한 고정관념이었을까. 훌쩍 유학을 떠날 수도 있었는데. 미국에 살고 있는 이모님께서 내게 유학을 권유한 때가 있었다. 그때 도전해 볼걸. 쓸데없이 젊은 날을 사법고시에 모두 고스란히 헌납하다니. 영국에서 일할 기회도 있었는데 가지 않았다. 그때 다니던 직장이 나름 안정적이어고 편해서 그 곳을 평생 직장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어리석었다.



이 곳에서 외국인과 결혼해 우리나라 부부들보다 훨씬 홀가분하게 살고 있는 언니들을 보고 있으면, 한국에서는 나이 먹어간다고 왜 그리 초조하고 불안해했는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다 난다. 노처녀, 똥차라는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면전에서 툭툭 던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경망스러움에 치를 떨었지만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나에게 달리는 표딱지들 앞에서 의연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러다 정말 똥차가 돼 버릴까 봐 겁이 나고 예민해졌다, 속으로는.



여자애가 왜 이리 까칠하고 드세냐는 손가락질도 참 많이 받았다. 내가 뭐 어디가 어떠냐고 겉으로는 센 척하며 큰 소리 땅땅 쳤지만, 사실 속으로 나는 왜 이 모양인가, 자책했다. 나도 따지기 싫고 싸우기 싫었다. 불합리한 것들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기를 소망했다. 드세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 그런데 여기 와 보니 웬걸, 나는 이 곳 여자들과 비교하면 너무 소심하고 지나치게 수줍다. 더 당당하게 내 의견과 느낌을 '죄책감 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알았더라면.


botanical garden이 식물원이라는 걸,
식물원이 유리 온실이 아닌
거대한 자연이라는 걸 진작 알았더라면.

내 삶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까.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보다 훨씬 능력 있고 당당한 내 모습도 멋지지만 소박한 결정 속에서 작은 세계에 머물렀던 나도 소중하다, 무식하게 촌스러운 내 모습도 나는 사랑한다, 이미 지나간 일을 자꾸 되새기며 아쉬워하는 건 어리석다, 오늘부터 하면 된다 등등. 이런 뻔하고 판에 박힌 말들. 교과서에나 나오는 모범생 같은 정답들. 조금도 위로되지 않는 거짓말들. 쓸데없이 괜찮은 척하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늘어놓지 않기로 한다.



달랐겠지. 기회도 많았을 테고. 남들 기준에 맞추느라 주눅 들거나 혹은 아등바등 죽을 것처럼 매달리는 일들이 없었겠지. 훨씬 홀가분하고 자유롭고 편안하지 않았을까. 물론 불안하고 위험한 순간들도 더러 있었을 테지만. 뭔가 로맨틱하고 낭만적인 일들도 갑작스럽게 펼쳐지지 않았을까.  

botanical garden이 뭔지만 알았더라면 나도 영국에서 일했을 텐데. 그럼 혹시 아나, 왕자님은 아니더라도 왕족 누구라도, 혹시!



10대 소녀도 아닌데 왜 이럴까. 누군가 이런 내 망상을 듣는다면 크게 비웃겠지. 내가 생각해도 유치하다. 이런 공상은 꽁꽁 속으로만.


오늘은 왠지 억울하고 아쉽고 뭔가가 후회되는 날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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