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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노엘 Jun 22. 2019

최초의 기억

좋은 이별 - 김형경 




소설가 김형경이 이별과 애도에 관해 쓴 심리 에세이다. 작가는 애도의 작업을 통해 어린 시절에 머물고 있는 내면의 자기를 함께 떠나보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치유와 성장이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애도 작업을 잘 이행하면 자기 자신을 잘 알아보게 되고 타인도 잘 알아보게 된다. 그리하여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능력이 커지고 더불어 삶의 다양한 국면에 대한 이해력도 커진다는 것이 작가의 설명이다. 


많은 설명 중 '최초의 기억'이라는 단어가 다가왔다. 


'최초의 기억'은 정신분석학의 용어로서 당사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드러내는 틀이라고 해석된다. 최초의 기억이 평화로운 들판으로 소풍 가는 일이면 그는 인생을 소풍처럼 인식한다. 할머니 등에 업혀 어두운 들판을 가로질러 올 엄마를 기다리는 일이 최초의 기억이라면 그는 평생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에 시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 기억의 첫 장면은 뭘까. 조금 들뜬 설렘으로 천천히 시간을 되돌려 본다. 


호선이가 생각난다. 6살인가, 7살인가 옆집에 살았던 나의 첫 번째 친구다. 잘 살고 있을까. 갑자기 그의 소식이 궁금하다. 매일매일 호선이랑 내 여동생이랑, 이렇게 셋이 종이비행기도 만들고 고무줄도 하고 바람개비도 만들고 간식도 같이 먹고, 그랬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보고 싶다. 


잠시 유치원을 옮겼던 장면도 생각난다. 왜 잘 다니던  유치원을 갑자기 바꾸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당시 친구들과 서먹하게 지냈던 일이 생각난다. 공주처럼 예쁘게 생긴 여자애가 있었는데 그 애가 바닥에 치맛자락을 나팔꽃처럼 펼쳐놓고 앉아 있었다. 내가 놀다가 잘못해서 그 아이의 치마 위에 앉았는데 '뚜둑' 소리가 났다. 그때 그 친구가 나한테 신경질을 냈던 기억이 난다.


원래 다니던 유치원 기억도 많이 난다. 정은실 선생님이랑, 유치원 위치랑 구조, 사모님, 친구들, 기도를 배운 거랑, 성경 구절을 암송하던 거랑, 매일 나를 바래다주던 유치원 봉고차도. 그런데 이때의 기억은 아마 7살 때의 기억이어서 최초의 기억이라고 하기엔 다소 늦은 감이 있다. 


기억의 조각들. 5살인지, 6살인지, 혹은 7살이었는지 명확하지 않은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어느 것이 생애 최초의 사건인지 분명하지 않은 뿌연 화면들. 조각조각의 사진들이 무질서하게 둥둥 떠다닌다. 


왠지 생애 최초의 기억이라고 하면 거창하고, 대단한 장면이 떠오르리라 기대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아니면 아기 때 기억이니까 아기자기하고 따뜻하고 포근한 이미지를 연상했는데. 따뜻한 햇살이나 연둣빛 잔디, 부드러운 이불, 뭐 이런 것도 아니었다. 화창한 오후와 꼬물거리는 아기, 이제 막 세상에 발을 내딛는 축복받는 생명체. 최초의 영상으로는 이런 이미지를 기대했었다. 그런데 신비롭고 평화롭기는커녕, 선명하지도 않다. 생각을 더듬으면 더듬을수록 아무런 연속성 없이 툭툭 튀어나오는 사건들이 어지럽기만 하다. 뭐가 이러냐. 무언가 매우 소중하고 귀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다. 섭섭하다.


최초의 기억은 행복하고, 편안하고, 안락한 무엇이었으면 했다. 그래서 힘들고 지칠 때 가끔씩 그 기억을 떠올려, 위로를 받았으면, 했다. 마치 예쁜 꽃이나 평화로운 사진을 보면 마음이 회복되는 것처럼. 그 어떤 누군가에게서도 위안을 받을 수 없을 때, 그런 때 혼자 꺼내어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도록. 그래서 그 누군가도 대신할 수 없는 슬픔을 혼자 감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따뜻한 사진이었으면, 했다. 많이 산 건 아니지만, 갈수록 타인의 위로가 부질없이 느껴지는 일들이 많다. 또 남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과 이야기하면 안 되는 일들도 점점 많아진다. 그래서 혼자 조용히 감상할 수 있는 소중한 장면을 기대했었다. 그랬는데. 너무 기대가 컸나 보다. 


과거의 기억은 이미 내가 어찌할 수 없고. 대신 앞으로는 봄날 나른한 오후 같은 기억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여유 있고 편안하고 모든 것이 느릿느릿 움직이는. 온화한 미소가 감돌고, 잔잔한 노래가 흥얼거려지는. 아무런 걱정도 고민도 힘듦도 없는, 그런 장면들. 생에 최후의 기억은 그렇게 마무리됐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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