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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들레 Jun 14. 2022

이 땅에 태어나 가장 잘한 일

다시 태어나도 너희들을 만나고 싶어



 나이 서른여덟이었다. 두 딸의 엄마였고 곧 마흔을 앞두고 있던 그때를  돌아보면 그저 안쓰러운 너무 젊은 '나'이다. 시어른 모시고   살림을 꾸리며 10살 큰아이, 6살 둘째를 돌보는데 온통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쏟던 시절이었다. 엄마의 자리, 며느리의 자리를 지키고자 잘하진 못했어도 열심을 다했다. 사실 그것만으로 내게 만만치 않은 일이었고, 익숙해 지기까지 수십수백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엄마손을 의지하지 않고는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어디를 갈 수도 없던 작고 연약한 아기들이 스스로 먹고, 입고, 걸을 수 있고 말도 한다. 그땐 몰랐으나 그건 기적이었다.  그 기적을 4번이나 경험했다.


아기는 자라면서 엄마품을 찾는 일이 점점 줄고, 세상엔 엄마가 아닌 다른 재미난 일들이 많음을 알게 다.  아이가 커가는 걸 보며 나도 세상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품었고,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어린이집 등원을 하면서 더 간절하게 되었다. 공부를 시작해서 자격증을 따놓기도 했고, 곧 뭔가 시작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풍선처럼  커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서른여덟, 그해 가을에 난 셋째를 임신했다. 다른 건 기억나지 않는다. 임신소식을 하자 수화기 너머 약간은 들뜬듯한 남편의 목소리와 퇴근 후  현관에서 나를 바라보던 남편의 얼굴이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떠오른다. 그의 눈이 웃고 있었다. 그때 남편의 나이 마흔을 넘기고 중반이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생애 마지막이 될 거라 여겼던 셋째의 출산이었기에 아들이기를 은근히 바랬다. 아니 하나님께서 당연히 주실 거라  의심치 않았다. 주변에서도 아들일 거라는 말들로 나에게 근거 없는 확신을 갖게 했지만,  아기가 나올 달이 가까워질수록  초조 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궁금함에 물어나 보자 싶었지만, 답을 들을 용기가 나지 않던 중 정기검진을 받으려 병원에 들렀을 때  용기를 내었다.


"선생님, 제가 위로 딸이 둘인데 이번에  아기 옷을 무슨 색으로 준비하면 될까요?"


아이의 성별을 가르쳐 주는 게 의사들 사이에서 금기시되던 시절이라 직접적인 질문을 피했다.


"글쎄요. 일부러 살 필요 없을 듯 보이네요"


딸 셋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는 순간 한꺼번에 많은 생각들이 지나갔다. 딸 셋을 낳는 게 내 탓이 아닌데도 왜 그 런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이를 하나 둘도 아니고, 셋을 이렇게 낳게 되는구나.  그것도 딸만 셋이라니. 무슨 거창한 가족계획을 세워두고 낳은 게 아니었다. 내 품에 들어온 작은 생명이 그저 불쌍하고 애처로웠다. 엄마 뱃속에서 하품하고 방귀도 뀌고 손가락도 빨면서, 세상밖에 나오기를 얼마나 간절하게 기다렸을까. 어쩌면 아기를 기다리는 엄마의 마음보다  아기의 간절함이 더 클 수 있겠다는 생각들었다. 엄마와 아기는 열 달 동안  탯줄로 이어져있고, 생각과 식성까지 공유하면서 완전한 하나를 이룬다. 이러니 남자들의 부성애와 모성애가 비교되어선 안되며, 비교의 대상도 될 수 없다.( 물론 가슴으로 낳은 아기들을 제외하고) 셋째 딸은 그렇게 세상에 태어났고, 우리 부부는 그 후 꼭 3년 만에 넷째와 만났다.  졸지에 딸 넷의 엄마가 되었고, 우리 집은 그때 이후 네에서 딸 부잣집으로 불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딸들

처음 섭섭함은 잠깐이었다. 나이 든 엄마를 놀라게 할 정도로 아기의 젖 빠는 힘은 놀라웠다. 아이를 셋이나 키웠어도 또 새롭고 또 새로웠다. 쪼꼬미 아기가 매일매일 자라는 걸 지켜보는 건 축복이었다. 아이가 자랄수록 요거 안 낳았음 어쩔 뻔했나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런 게 내리사랑이라 하는 건가. 큰아이와 막내는 무려 띠동갑이다. 큰아이들에겐 시행착오가 많은 서툰 엄마였다. 욕심과 열정이 앞섰고, 비교도 많이 했었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는 말처럼 아이들에게 육아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의도치 않은 상처를 많이 주었다. 막내를 키우며 아이들 어릴 적 생각이 자주 스쳤다. 큰애들도 아기 때 이렇게 이쁜 짓을 많이 했을 텐데 좀 사랑해 주지 못했다는 미안에 마음 깊은 곳이 아리기도 했다.



큰애랑 띠동갑인 막내가 며칠 전 10살이 되었다.

생일날, 냉장고에 슬며시 붙여두고 간 메모지 한 장.

머 대단한 걸 해준 적도 없는데 내가 어디 가서 이런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변변한 새 옷 한 벌 사주지 못했고, 좋아하는 놀이공원도  몇 번 데리고 가지 못했는데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한다 고백한다. 아직은 의식처럼 잠자리 들기 전 달려와 뽀뽀를 해야 하는 막내, 그런 아이가 너무 사랑스럽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으나, 나의 몸은 아이를 향한 내 마음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저 아이가 주는 사랑을  받으며 세월 가는걸 잠시 잊을 뿐이었다.


얼마 전 13살이 된 셋째 딸이 내게 물었다.

"엄마 다시 태어나도 아빠랑 결혼할 거야?"


-그럼, 론이지

  

"왜? 아빠는 잘 생기지도 엄마한테 잘해주지도 않잖아"


-아빠랑 결혼하지 않으면 너희들과 만날 수 없고,

너희들 엄마될 수 없으니까. 엄마가 태어나 제일 잘한 일이 너희 넷 낳은 거야.


드라마 고백 부부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돌아가신 엄마가 계신 과거 젊은 시절이 아니라, 아이가 있는 현재에 머물기로 한 장나라의 선택 아기를 키우는 엄마라면 다 폭풍 공감하지 않을까. 나 역시 다시 돌아간다 해도  엄마를 향한 그리움은 가슴에 묻고 우리 아이들을 선택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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