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예찬 - 케냐 마사이 마라와 나이바샤 호수
이런 상상을 한다. 여름, 일을 마치고 여전히 떠 있는 해를 보고 부단히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들어와 에코백에 블루투스 스피커, 냉장고에 있는 콜라를 챙긴다. 바지를 벗어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건을 챙긴 후 현관의 말려있는 돗자리를 챙겨 차로 간다. 차를 타고 5분 거리에 있는 해수욕장, 바위 옆에 돗자리를 깔고 노래를 튼 다음 수온을 확인한다. 아직 해가 지려면 한 시간 정도 남아있고 나는 물속에 들어간다. 물속은 고요하고 더 이상 블루투스 스피커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30분 정도 수영을 하고 돗자리에 돌아와 콜라를 마시며 눕는다. 하늘은 선홍빛을 띤 푸른 하늘이고 저 멀리 산방산 뒤로 해가 지고 있다. 파도는 잔잔히 치고 있고 나는 오늘 하루가 끝난 것 같은 기분으로 누워있다.
내가 생각한 나의 미래,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 자연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느낀 제주에서의 날들 이후로 나는 자연을 외치는 사람이 됐다. 물론 자연에서만 살려니 이따금 그리워지는 도시의 살찐 맛이 그립기도 해 도시로 놀러 가기도 했지만 일상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었다. 앞으로도 그런 삶을 생각하며 여행을 시작했고, 어느 국가의 어느 도시를 가도 내가 앞으로 살 곳은 제주도 뿐이라는 확신만 더 다지는 그런 시간이었다.
몽골에서 카자흐스탄으로 넘어왔을 때 푸른 잎사귀들을 보고 마음이 편안했던 기억이 있고, 이집트에서 아프리카로 넘어온 지금, 다시 한번 그런 기분을 느낀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도착했을 때 도시의 가로수를 보며 편안함을 느꼈다면 이곳은 자연 그 자체다. 마사이 마라의 초식 동물과 그들이 먹는 나무와 풀, 육식 동물과 그들이 먹는 초식 동물의 사체, 자연이 끝없을 것 같이 펼쳐져 있다. 나이바샤 호수는 초식 동물들이 물을 마시며 쉬기 위해 모이는 곳으로 물 속이나 파피루스 풀을 뜯고 있는 하마를 보고 있으면 내가 자연을 이렇게 가까이할 수 있구나 싶다. 과거에는 나무와 풀, 꽃 등 그 자리에서 우리를 위로하는 자연을 보고 감격을 받았다면 여기 아프리카에서 만난 자연은 역동적으로 나를 감격시키는 그런 자연이다.
사람은 각자 놓인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누군가는 아프리카에서 태어나 가이드로 살아가며 자연에 묻혀 사는 것이 무덤덤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아프리카와는 정 반대에 살면서 일생에 한 번 이곳에 와 색다른 경험을 한다. 다만 어느 곳에나 자연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있는 그곳에서 인지하든 하지 않든 감사를 할 수 있다. 어차피 누군가는 동물을, 누군가는 식물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심지어 누군가는 둘 다 안 좋아할 수도!, 자신의 선호에 따라 감사할 수 있는 마음만 갖게 되면 충분한 것 같다. 나는 사파리에서 동물을 보며 동물원에서 볼 수 없던 그들의 본모습을 감상하며 푹 빠졌지만 사실은 식물이 내게 울림이 더 큰 것 같다.
마사이 마라와 나이바샤 호수에서 동물들이 그들의 영역에서 보여주는 모습을 보며 도시의 동물원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 자신들의 영역에서 끌어내 인간의 영역에, 특히나 그 좁은 공간(우리)에서 지내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못된 짓인지 생각하게 됐다. 예를 들면 과거 흑인을 노예로 부리고 이를 백인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우리에 넣어 전시를 하는 그런 것과 다를 바 없다. 사실 마사이 마라 사파리도 표범이나 치타, 사자 같은 인기 있는 동물이 한 번 나타나면 그 동물을 둘러싸는 차 무리를 보며, 나도 그 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었지만, 꽤나 회의감이 들었다. 다만 마사이 마라 같은 사파리는 우리가 그들의 영역에 들어가고 만약 이들이 원하지 않으면 숨거나 피하면 그만이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가 떠오르기도 했다. 어쨌든 우리가 자연을 아끼기 위해서는 인간의 관점이 아닌 그들의 관점에서 그들을 존중, 내가 가장 우선순위에 둬야 한다 생각하는 것은 영역이다,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를테면, 동물원은 없애고, 자연보호 구역에서 사파리를 한다면 하루나 한 달 할당량을 정해놓는 것이다.
자연에 머물며 동물도 눈길을 끌지만 식물도 못지않게 눈에 띄었다. 사실 동물보다 많이 보이는 식물은 풍경으로 무뎌져 눈에 띄지 않을 법한데 넓은 초원의 하나 서 있는 나무처럼 내 눈을 끄는 나무들이 보였다. 나는 동물의 종을 잘 알지 못하는 것처럼 식물 역시 세세하게 알지 못하지만 그저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존재로 언제나 자리하고 있다. 어디에 있든, 언제나 날 지지해주는 가족과 같은 그런 편안함을 가져다준다. 나이바샤에 갔을 때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캠핑장에서 이틀을 보냈는데 나이바샤 호수에 자리한 캠핑장에는 물속에서 열을 식히고, 파피루스 풀을 먹으러 나온 하마를 구경하거나 나무와 텐트 또 풀밭에서 장난치는 원숭이들을 구경할 수도 있었지만, 정말 높게 솟은 나무와 잔잔한 호수, 해 질 녘 나무들 틈으로 사라지는 햇빛은 내가 이를 넋 놓고 보게 하는 안정감이 있다.
이런 환경에서 사는 이들은 얼마나 축복받았을까. 내가 한국을 벗어나 이런 곳을 여기저기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이들은 갖고 있을까. 제주에 사는 친구가 서울로 올라가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나, 우간다 마사카 마을에 사는 친구가 한국에 가 살아보고 싶어 하는 마음처럼 사람은 자신이 처한 곳을 벗어나 새로움을 추구할까. 특히 젊을수록 더더욱? 나는 여전히 제주에 뿌리를 내리고 싶다. 나무와 달리 나는 한 자리에 박혀있을 필요는 없지만 언젠가는 나무처럼 한 곳에 뿌리내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 동시에 경험하지 못한 광활한 자연을 볼 때는 이곳에 살면 얼마나 좋을까에 대한 생각도 한다. 젊음이 방황의 시기라는 것이 어쩌면 이런 의미일지 모르겠다. 어디든 가고 싶고 또 어디에서 멈출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시기. 아마 이 여행이 끝날 무렵에는 나 역시 나의 뿌리가 자리 잡을 준비를 마치고 조금씩 자리 잡을 수 있으면 좋겠다. 확실한 것은 내 뿌리는 자연과 함께 함이다. 나는 사람은 미워해도 자연은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