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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urquoise Sep 30. 2015

내겐 너무 치명적인 세레나데

내게 오는 길 - 성시경

아직도 이 노래는 내 심장 박동에 영향을 미치는 곡이다. '성시경표 발라드'의 기반을 세웠다고 볼 수 있는, 국내 발라드 가요에서만 따지자면 (신승훈을 제외하고는) 일종의 클래식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은 만인의 노래인 것을. 나는 2010년 가을 어느 날 이후로 곱게 감상할 수가 없게 되었다. 내게 이 노래는 영화 <미션 임파서블>의 메인 테마 같은 긴장감이고, 베토벤 교향곡의 집대성이라 일컬어지는 <합창> 같은 환희이며, 부르다가 내가 거의 '죽을뻔한' 김소월의 <초혼> 같은 아릿함이다. 성시경의 <내게 오는 길>은 생애 단 한 번 등장할 프러포즈에 동원된 일생일대의 노래다.


결론부터 말하면 프러포즈 자체는 성공적이었다. 내 기억에도, 아내의 기억에도 결코 나쁘지 않았던 이벤트로 남아 있다. 준비 과정부터가 일생일대의 작전다웠다.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프러포즈가 좋을지 '설문조사'를 실시했고, 가장 효과적인 '타격'을 입히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친구들을 동원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프로페셔널하게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업체'를 선정하기로 했다. 프러포즈 반지도 미리미리 백화점에 가서 매우 무리를 하며 하나 장만했고, 작전이 수행될 필드에 사전답사를 나가 동선 파악도 확실히 해뒀다. 동영상, 꽃다발, 아침부터 여자친구(지금의 아내)를 감쪽 같이 속일 거짓말까지. 이 정도면 방금 만난 여자를 데리고 들어간다고 해도 결혼할 자신이 있다 싶었다. 다만 한 가지, 프러포즈와 함께 부르려고 했던 노래가 복병이었다.


성시경표 발라드는 듣기에만 좋다. 절대로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당시 나는 성시경 노래 부르기에는 내심 자신이 있었다. (무슨 '똥배짱'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프러포즈용 선곡이라면 조금 더 쉽게 소화할 수 있는 노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오늘을 위해 노래방에서 십 년을 보냈다"는, 무협지에 나올 법한 결심을 하며 '무조건 성시경'으로 가닥을 잡았다.


무모한 선택은 연이은 완착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그나마 성시경 발라드 중에 노랫말이 그럼직하고, 선율을 잘 알고 있는 노래로 (예를 들면 <넌 감동이었어> 같은) 골랐으면 좋았을 것을. 굳이 잘 모르는 1집에서 노래를 뽑아냈는지 모르겠다. 뭔가 좀 희소성이 있어 보였던 걸까. 심지어 가사를 곱씹어보면 <내게 오는 길>은 프러포즈에 그다지 잘 어울리지도 않는다. 결정적으로, 그 당시 나는 <내게 오는 길>과 <처음처럼>을 심각하게 헷갈리고 있었다. 두 노래 모두 어떻게 부르는지 정확히 모르고 막 섞어 부르고 다니던 나쁜 습관이 이미 성대 깊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예측할 수 없었던 치명적인 걸림돌은 또 있었다. 감정이다. 프로 가수가 아닌 나로서는 노래하는 도중에 감정이 복받쳐 오르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상대는 7년을 나와 동고동락하고 청혼을 받는 사람이다. 그녀를 앞에 두고 온 마음을 다해 노래를 하는 상황을 나는 미처 상상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펑펑 우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평소 노래방에서 갈고 닦은 허술한 복식호흡 따위는 전혀 사용할 수 없을 텐데, 가엾게도 나는 너무 서툴렀다.


결과적으로, 나의 <내게 오는 길>은 3분 59초 동안  유례없는 패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 건너 편의 아내가 알게 될까 노심초사하며 피아노 MR에 맞춰 '치는 척'을 하느라 첫 음절부터 박자를 놓쳤다. 템포를 간신히 따라잡았다 싶었을 때,  머릿속에서 <내게 오는 길>과 <처음처럼>의 선율이 갑자기 꼬이기 시작했다. 상대방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분위기로 압도해야 할 상황에 노랫가사와 멜로디가 헷갈리는 모습이라니. 시쳇말로 '고개 처박고' 안 틀리기 위해 머리를 굴리다 1절이 지나갔다. 2절은 좀 나았을까. 아니, 노래에 좀 적응됐을 무렵부터는 감정의 쓰나미가 몰려왔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내의 모습에 나도 주책 맞게 눈물이 울컥 샘솟은 것이다. 문제는  그때 나는 노래를 하는 중이었고 2절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성대는 굳게 문을 닫은 채 쏟아지는 눈물을 막고 있었고, 코는 부족한 호흡을 만회하느라 있는 힘껏 벌름거리고 있었다. 이미 비주얼로는 최악인 상황, 어떻게 넘겼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무튼 난 전체 클라이맥스 ("눈물이 또 남아 있다면" 부분)에 도달하여 KO펀치를 맞았다. 그러게 잘 아는 성시경 노래를 했어야 했다. 1절과 2절을 넘어오느라 너무 고생을 한 탓인지, 가사와 멜로디가 다 기억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토록 그 부분만 연습했건만. 결국 최악의 비주얼인 상태로 가장 중요한 부분을 '허밍'으로, 무려 "음음음"으로 마무리짓는 결정적인 한 방을 얻어 맞고 내 멘탈은 코마 상태로 빠지게 되었다. 내 혼미한 기억에 따르면,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하고 빵 터져야할 순간에 피식 웃고 있었다.


"남편이 노래 잘 하는 거 좋지 않아? 다른 여자들은 노래 잘 하는 남자 좋아한다더만"


연애시절부터 장난반 진담반으로 계속해오던 얘기다. 어디 오디션 프로그램에 명함 들이 밀정도도 못된 미천한 실력이지만 아내한테만은 노래 잘 한다는 칭찬을 듣고 으쓱하고 다니는 사내가 나다. 다만 아내는 노래 잘 하는 남자에게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하겠다고 한다. 왜 남들은 나보고 노래 괜찮게 한다고 하던데 너는 잘 한다고 말만 하지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가 않냐며, 약간은 서운한 기색을 보일라치면 아내는 이 노래를 슬쩍 건드린다.


"그럼 내게 오는 길은 어때, 한 번 더 불러줘 봐"


우리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난다. 성시경의 <내게 오는 길>은 내 인생의 노래이자, 신청 금지곡이다.




내게 오는 길 - 성시경

지금 곁에서 딴 생각에 잠겨 걷고 있는 그대
설레는 마음에 몰래 그대 모습 바라보면서 내 안에 담아요
사랑이겠죠 또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죠
함께 걷는 이 길 다시 추억으로 끝나지 않게
꼭 오늘처럼 지켜갈게요

사랑한다는 그 말
아껴둘걸 그랬죠
이제 어떻게 내 맘 표현해야 하나
모든 것이 변해가도 이맘으로 그댈 사랑할게요

망설였나요
날 받아주기가 아직 힘든가요
그댈 떠난 사랑 그만 잊으려고 애쓰진 마요
나 그때까지 기다릴 테니

사랑한다는 그 말
아껴둘걸 그랬죠
이제 어떻게 내 맘 표현해야 하나
모든 것이 변해가도 이 맘으로 그댈 사랑할게요

눈물이 또 남아있다면 모두 흘려버려요
이 좋은 하늘 아래 우리만 남도록

사랑할 수 있나요
내가 다가간 만큼
이젠 내게 와줘요
내게 기댄 마음
사랑이 아니라 해도 괜찮아요 그댈 볼 수 있으니
괜찮아요 내가 사랑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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