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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urquoise Oct 11. 2015

그렇게, 적당히 윤하스러운

Strawberry days - 윤하

되짚어보면 내 인생의 어떤 드라마틱한 사건과도 연관은 없는 것 같다. 뭐, 하나쯤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전혀 기억에 없는 걸 보면 이 가수를 좋아할 만한 계기로 별나게 꼽을 일은 없다고 해도 되겠다. 그런데도 가장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냐고 하면 난 주저 없이 윤하를 말한다. 그녀의 노래는 내 생활의 BGM이다. 드러내 놓고 콘서트를 쫓아다닌다든가, 브로마이드를 구해 벽지 대신 쓴다든가 하는, 흔히 '윤덕'이라고 하는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니지마는 디지털 음원 시대에 접어든 후에도 한국, 일본 가릴 것 없이 CD를 사다 쌓아 놓으려는 걸 보면 (아이가 태어난 후로는 사실 이마저도 쉽지 않지만) '팬'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윤하가 왜 좋으냐, 이것도 미스터리다. 연애시절부터 아내는 "윤하가 그렇게 예쁘냐"며 나를 끈덕지게 추궁하지만 사실 외모 때문에 팬심이 가득한 것은 아니다. (전혀 없다고도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좋아하는 이유를 아내에게 딱히 제대로 설명한 적도 없다. 아니, 설명하는 데에 매번 실패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특출 난 부분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내가 이 가수를 이래서 좋아한다는 것을 듣는 이에게 납득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일 게다. 그냥, 좋아할 뿐이다.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을 때 왜 그녀가 좋은지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모호한 것처럼, 윤하가 피아노를 치며 <비밀번호 486>을 부르던 모습을 본 어느 날부터 지금까지 난 '짝사랑'을 이어가고 있다.


그녀의 노래 중 어느 한 곡을 내세우기가 어려운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혜성>이라는 곡도 내 인생의 노래로 걸어보고 싶고, 가장 '윤하다운' 노래로 여겨지는 <좀 더 가까이>도 소개하고 싶다. 나만큼이나 '그냥 팬'인 친구와 동시에 '엄지 척'했던 <추억은 아름다운 기억>도 상당히 좋은 노래고, 비교적 최근에 나온 <People>이라는 곡도 윤하의 도전적인 면모를 드러낸 작품이다. 하지만 좋은 노래를 전부 소개하는 건 역시 무리다. (가득한 팬심을) 제대로 담아내려면 짧은 글 몇 자는 턱없이 부족하다.


<Strawberry days>는 나름 정말 고심해서 고른 곡이다. 너무 알려져 있지도 않고, 너무 실험적이지도 않은, 적당히 '윤하스러운' 노래다.


<Strawberry days> 노랫말은 사실 아저씨가 듣기에는 좀 '닭살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노래의 화자는 고교생쯤으로 보이는 여학생이다. 평범하다고 하기에는 교실에서도 잘 눈에 띄지 않아 지나치게 조용한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교실에나 있는, 출석부를 확인해야 "아 저런 아이가 우리 반에 있었구나" 싶은 아이다. 그런데 그처럼 '배경'같은 여자 아이에게 '또 다른 배경'이 관심을 보인다. 내성적인 여고생은 그 남자 아이가 자기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놀라워한다. 나를 찾아내는 것도 모자라 관심을 보이다니 말이다. 그마저도 박력 있는 고백도 아니었을 테고, 점심 같이 먹을래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이 아닌 누군가의 관심을 받는 것이 생애 처음이었을 여자 아이는 밤잠을 못 이루며 낮에 있었던 일을 끊임없이 곱씹는다. 남자 아이의 음성이 창 틈으로 새는 바람에 같이 실려 들어오는 것 같은 기분, 그 아이로 인해 평범했던 하루가 오렌지 빛 향기를 가진 시간으로 바뀌는 마법.


마치 일본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노랫말을 내가 온전히 공감한다는 것은 솔직히 거짓이다. 학창 시절 좋아하는 여자에게 설레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마는 여고생의 마인드를 어찌 남중 남고를 나온 내가 알 수 있으리오. 교내에서는 절대 일어날 리 없다고 여기며 살아온 인생인데다, 설령 남녀공학이었다 치더라도 투명인간처럼 지내는 남자 아이에게 먼저 좋아한다고 다가올 여자가 있을까 싶은 염세적 선입견의 뿌리가 이미 너무 깊다. 하지만 그 덕에 상상은 더 많이 가능해진다. (나와 비슷한 '테크트리'를 탄 사내들도 마찬가지일테다) 매번 '들이대는' 역할만 줄기차게 해왔던 내게, 뜻하지 않았던 어떤 수수한 여자 아이가 다가와 관심을 표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덜컥 고백을 '받은' 날 밤, 잠자리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으면 어떤 그림들이 그려지는 걸까. '있을 것 같지 않았던 일'이 벌어지면 무료했던 하루 하루가 정말 노래 제목처럼 (해석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딸기처럼 상큼한 날들로 바뀌게 될까. 부끄러움에 '이불킥'하며 잠 못드는 밤이 늘어나면, 매일 "게임 좀 그만해"라며 잔소리하던 엄마도 내가 누구 때문에 저러는지 궁금해할까.


노래를 듣는 동안 머릿속을 지배하는 이런 류의 공상을 더 쉽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이 노래의 작곡자이자 작사가인 조규찬이 사용한 은유들이다. 가사에 쓰인 단어들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자면, 이 노래는 일종의 '반란'처럼 느껴진다. 직설적으로 "널 좋아한다"는 얘기를 서슴지 않고 뱉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처럼 지켜지고 있는 가요계인 것을, 어쩌면 이토록 에둘러서 하는 표현도 한 번 더 걸러서 쓸 수 있는지 신묘하다. 작사가 조규찬은 평범한 두 아이를 각각 '포니테일에 숨은', '귀여운 스니커즈'로 대변했다. 어설픈 고백을 받은 여고생의 기쁨을 '콜라'라고 표현했고, '몸살을 지난 상큼한 아침 공기'를 마시고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랑에 빠져 하늘로 날아갈 것처럼 들떠 있는 소녀의 심정을 '너와 손을 잡고 달 위에 서 있다'는 말로 대신했다. 가사만 보고 있노라면 어느 여류 작가의 수필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 같은 사랑스러움이 묻어나는 것이다.


가사 전반에 깔린 조규찬 특유의 감성을 현실화시키는 마법은 윤하의 목소리다. 최소한의 바이브레이션으로 말하듯 편하게 부르는 것이 가사의 분위기를 한껏 살려낸다. 윤하하면 대부분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발적인 진성을 떠올리지만 (그게 윤하의 또 한 가지 매력이기도 하지만) <Strawberry days>에서는 모든 힘을 빼고 부르며 담백함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증명한다. 많은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윤하의 노래로 꼽는 <기다리다>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기 전에도 윤하라는 가수는 꾸미지 않은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작품을 만들어내는 보컬이라는 걸 조용히 외치는 노래가 있었던 것이다.


Strawberry days - 윤하

낯선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지 몰랐어
흔한 포니테일에 숨은 내게 관심을 보인 너

설레이는 밤
자꾸 떠오르는 음성
창 틈으로 스민 바람결을 따라와
날 미소 짓게 해 귀여운 너의 스니커즈

Don't fade away
콜라처럼 상큼한 이 순간
Strawberry days
몸살을 지난 상쾌한 아침 공기처럼
평범한 내 하루도
다 너로 인해 오렌지 향기를 가져
어느새 너와 달 위에 서 있어
사랑에 빠졌어

낯선 내일과
잠드는 방안의 반딧불이
너의 메시지를 전하며 반짝이지 기특해

아직 내 이름을
조심스레 부르는 너
데칼코마니처럼 서로 닮아가길
그렇게 된다면 편하게 날 불러줘

Don't fade away
콜라처럼 상큼한 이 순간
Strawberry days
몸살을 지난 상쾌한 아침 공기처럼
평범한 내 하루도
다 너로 인해 오렌지 향기를 가져
어느새 너와 달 위에 서 있어
너의 이름을 써 내 마음 위에 써

넌 알고 있니 평범한 내 모습도
너로 인해 유일한 색깔을 가져
어느새 너와 달 위에 서 있어

너의 이름이 나를 달라지게 해
나를 소중하게 해
잠 못 드는 날 보며 엄마는 널 궁금해해

콜라처럼 상큼한 이 순간
Strawberry days
몸살을 지난 상쾌한 아침 공기처럼
평범한 내 하루도
다 너로 인해 오렌지 향기를 가져
어느새 너와 달 위에 서 있어
사랑에 빠졌어


어쿠스틱 기타 선율과 기본적인 드럼 비트만 섞어 놓은 세션, 특별할 것 없는 날 좋아해주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의 환희와 설렘을 멋지게 담아낸 조규찬의 감성. 거기에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무겁지 않게 살짝 덧칠된 윤하의 목소리까지.


많은 이들이 피아노 치며 빠른 노래를 부르는 어린 가수로 '착각'하고 있는 윤하가 사실은 어떤 매력을 가진 가수인지, 단 4분 안에 넉넉히 보여줄 수 있다. <Strawberry days>는 그렇게, 적당히 윤하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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