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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urquoise Nov 10. 2015

당신의 시대는 어떤가요?

<앵무새 죽이기> - 하퍼 리

일전에 <스토너>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미국의 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소년이, 그 당시만 해도 '이상한 짓'이라 여겨졌던 교육을 받고 학문에 눈을 떠 대학 교수가 되는 일대기를 그린 작품. 책 뒷면에는 미국에서 꽤 많은 사랑을 받는 소설이라는 부연 설명이 적혀 있었다. 이따금 서점 구경을 할 때면 매대에 꺼내져 있는 <스토너>를 보고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도 스테디셀러로서 상당한 매력이 있나 보다, 짐작해본다. 나 역시 어느 블로그에서 이런 작품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미국 문학 작품 중 이토록 아름다운 문체를 가진 소설을 없다는 극찬에 혹해 책장을 넘긴 케이스다. 하지만 <스토너>를 읽고 나서 굳이 리뷰를 적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른 이들에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전혀 '내 스타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앵무새 죽이기>도 <스토너>의 마지막 책장을 넘길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이 책 역시 '내 스타일'은 아니다. 굳이 따져본다면 완독이 쉽지 않았던 쪽에 속한다. 빽빽한 글자 간격과 문고판처럼 작은 제본 크기, 500페이지가 넘는 완고함까지 합쳐지면 사실 다 읽은 나 자신이 대견스러울 정도랄까. 물론 나라는 독자가 워낙에 깊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슈퍼플라이급'이라는 점도 감안해야겠고, 독서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흔한 '문인'들처럼 많은 글을 빨아들인 경험 또한 일천하니 어쩌면 내가 가진 해독(解讀) 능력을 벗어난 대작일 수도 있겠다. 또, 하퍼 리의 소설을 좋아하는 수많은 독자들에게는 실례가 되는 서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동네 책방에서 책을 추천해주는 형의 입장에서 볼 때 <앵무새 죽이기>는 쉽게 누군가의 손에 쥐어주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자, 그럼 이제부터가 미스터리다. 그렇게 힘에 부친 책이었다면 나는 무엇 때문에 끝까지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는지. 그것도 몇 주에 걸친 '고난의 행군'도 없이 3일 만에 후딱 헤치워 버릴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냐는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스토너>는 리뷰 쓸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약간의 실망감을 느꼈다면서 비슷한 느낌을 받은 <앵무새 죽이기>에 대한 글을 끄적이고 싶은 욕망은 왜 일어나는지. 내 두뇌는 아직도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다만 오랫동안 가슴에 남을 것 같은 여운은 리뷰를 쓰는 이 순간 이미 메이콤 마을 수채화를 눈 앞에 그려내고 있다.


<앵무새 죽이기>는 미국 경제 대공황이 있던 시절, 번화하지 않은 시골 마을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소설의 화자는 스카웃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꼬마 여자아이이고, 이야기를 관통하는 가장 큰 사건의 주요 인물로는 애티커스 변호사, 즉 스카웃(루이스)의 아버지를 꼽을 수 있지만 이 인물들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깨름칙하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등장하는 이웃 사람들과 친척들은 조연, 즉 주인공의 사건 전개를 이끌기 위한 '필요'에 의해 나와야 할 텐데 그렇지가 못하다. 톰 로빈슨의 재판이라는 큰 줄거리를 진행하는 데에 여름마다 놀러 오는 딜의 존재는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젊은 시절 사고를 치고 집에 격리된 채 은둔하는 부 래들리는 '인종 차별'이라는 주제의식을 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역할을 하는지 (물론 말미에 약간의 역할을 하긴 하지만 소설 전반부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한다면 맥이 풀릴 정도다),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모디 아줌마와 메리웨더 아줌마는 왜 스카웃의 집에서 숙녀들의 티타임을 연출하고 있는지, 작가가 옆에 있으면 묻고 싶을 정도다. 메이엘라 유얼 성폭행 재판을 응집력 있게 그려내고 했다면 하퍼 리는 아마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은 것 같다. 당시만 해도 시골 마을에서 일어나기에는 가히 혁명적인 사건을 두고 한 인간이나 가족 몇 사람이 변하는 모습을 그릴 생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퍼 리가 '메이콤'을 주인공을 설정한 것은 시대가 금기로 삼은 가치에 대한 변화에 '공동체'가 받는 충격을 그리고 싶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앵무새 죽이기>는 하나의 나라, 혹은 하나의 시대에 던져진 화두에 대한 사회의 모습을 메이콤이라는 '미니어처'를 통해 표현하려는 시도였다.


하퍼 리의 이러한 도전은 비단 소설의 시대적 배경인 대공황 시기의 미국에 국한되지 않는다. 긴 여운과 많은 생각을 남기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이야기의 행간을 넘어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시대는 어떤가요?"

메이콤이라는 마을의 '픽션'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상 독자들에게 작가는, 어떤 '논픽션'을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양심과 연민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앵무새 죽이기>의 시대에서는 흑백갈등과 남녀차별이다. 책을 읽고 있는 입장에서야 2015년에 노예제도의 부당함을 이해하기가 왜 어렵겠는가. 문제는 책 속의 인물들이다. 미국 남부에 속한 메이콤은 노예제도에 대해 다분히 보수적인 입장을 보일 수밖에 없다. 거기다 시골 마을인 만큼 다른 곳과의 왕래도 많지 않고 그만큼 폐쇄적이다. 1930년대를 사는 이들에게 "흑인은  차별받으면 안 된다. 피부 색과  관계없이 모두 같은 사람이다"라는 얘기가 얼마나 웃기게 들릴지, 애써 빙의되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 가능할 것이다. 소설 속 백인들에게 지붕도 없는 교회에 흑인들만 모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백인 가정에 흑인 보모를 두는 것도 흔한 모습이며, 각종 범죄 용의 선상에 다짜고짜 흑인을 거론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행동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런 행동 양식이 매우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절대 깨질 것 같지 않은 공고한 전통을 흔드는 것은 인간이 가진 양심이요, 사람에 대한 연민이다. <앵무새 죽이기>는 마치 미래에서 교육을 받고 온 듯한 애티커스 변호사를 통해 이를 대변한다.

"법은 모든 이들에게 평등해야 하고, 우리는 만인은 똑같은 권리를 갖는 나라에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변호사 한 사람의 열띤 변론만으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재판정에 모인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 들었고 그 속에 평등이라는 씨앗을 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당대의 어떤 논리로도 톰 로빈슨을 자유롭게 할 수는 없었지만 '주인공'인 마을 사람들이 유얼 일족에 대해 반감을 품게 하고 로빈슨 가족을 불쌍히 여기게 한 것만으로도 애티커스 변호사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다. 우리 시대에서는 어떤 걸 흑백갈등과 남녀차별의 자리에 두어야 할지가 다를 뿐이다. 요즘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다문화가정에 대한 반감도 있을 것이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이슈가 된 동성애자 커플에 대한 시선도 가능할 것이다. 아마 100년쯤 지난 후의 사람들이 다문화가정이나 동성애 이슈를 본다면 시쳇말로 웃기지도 않겠지만, 당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굉장한 난제임이 분명하다. 이 시대의 어떤 석학도, 어떤 정치가도, 이 문제를 합리적 논리만으로 일괄 정리할 수는 없다. 그런 사람의 존재는 되려 위험하다. (제2의 우생학이 탄생하지 않을 거라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애티커스  변호사'일 뿐이다. 누구나 갖고 있는 양심과 사람에 대한 연민을 끄집어 낼 수 있는, 그래서 터부시 여겨왔던 소수, 혹은 힘 없는 자들의 현실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던질 수 있는 '트리거'로서의 역할. <앵무새 죽이기>는 정확히 그 지점에 작용하는 소설이다. 오랜 기간 사랑 받는 스테디셀러가 된 근원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이쯤에서 <스토너>에게 고맙다고 해야겠다. <앵무새 죽이기>를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생각이 든 데에는 <스토너>가 깔아 놓은 기단(基壇)이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기승전결이 불분명하고 클라이맥스마저 너무 평평해 어디서 웃고 울어야 할지 적응이 안 되는 한국적인 독자에게 <스토너>는 일종의 왁찐이었다. 미국 문학이 이야기의 높낮이보다 메시지의 강약으로 가슴을 때린다는 걸 미리 알고 접한 덕에, 하퍼 리가 활자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바를 비교적  빠짐없이 얻을 수 있었다. <스토너>에 현대의 한국 독자와 공감할 수 있는 코드가 조금만 더 많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고 <스토너>라는 명작을 감히 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님을 분명히 해둔다. 어떤 시간을 살고 있는 독자라도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는 물음, 이것이 담긴 <앵무새 죽이기>가 개인적으로 더 큰 공명을 불러 일으켰을 뿐이다. 어디까지나 취향의 문제다.


특이하게도 하퍼 리는 <파수꾼>이라는 작품을 먼저 쓰고, 그 프리퀄로 <앵무새 죽이기>를 집필했다고 한다. 1편보다 속편을 먼저 써놓은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처음 들어본 '사태'다. 마케팅적으로 훌륭한 전략이라면 전략인 것 같다. 이미 <파수꾼>이 어떻게 쓰여지고 있을지 궁금해지고 있으니 말이다.


조만간 <파수꾼>도 읽을 참이다. 하지만 당장 손이 갈 것 같지는 않다. 책을 옆에 두고 리뷰를 적고 있지만 슬쩍 바라볼 때마다 살벌한 기운이 감돈다. 저런 걸 어떻게 또 읽지 싶은, 범인(凡人)의 자세로 돌아온 것이다. 남들이 유명하다니까 한 번 읽어 볼까 싶은 독자들도, 말은 안 해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꽤 많을 것이다. 그렇게 느끼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이 책은 무협지나 판타지 소설이 아니다. 게다가 초반부에 시대적 배경이나 공간적 설정을 세팅하는 데에 꽤 많은 노력이 필요한 편이다. 하지만 잠깐 복잡할 수 있는 머릿속을 차분히 잘 정리하며 끈기를 갖는다면 <앵무새 죽이기>는 충분한 값어치가 있는 책이다. 어디에 가든, 누구를 만나든, 손에 꼽는 '클래식' 서적 중 하나로 하퍼 리의 대표작은 결코 부족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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