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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urquoise Jan 01. 2016

'프랑켄슈타인'을 만나다

<시인> - 마이클 코넬리

완독 한지 벌써 보름쯤 됐을까. 아니, 더 지났나. 연말이라는 핑계로  이것저것 에너지를 쏟다 보니 이제야 키보드에 손을 올리게 됐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끄적였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생각을 펼쳐낼 수 있었을 텐데.


이 책은 그런 '대접'을 받으면 안 되는 존재다. (혹시 봐놓고 새카맣게 잊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여태 이만한 '물건'을 본 적이 없다. 리뷰를 쓰려고 다시 책장을 훌훌 넘기자 코넬리의 문장 속에 폭 빠져 지냈던 순간들이  머릿속에 번져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때의 짜릿함을 몸이 아직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팔짱을 끼고 하나씩  뜯어본다면 <시인>이라는 소설이 톡톡 튀거나  반짝반짝 빛나는 '명문(名文)'이라고 보긴 어렵다. 문체는 건조하다 못해 쫙쫙 갈라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짤막하고 간결하다. 플롯의 흐름도 어디 한 구석 쉬어가는 곳 없이 치열해 숨이 막힐 정도. 사건과 캐릭터에 대한 전지적 작가 시점의 내면 서술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상황은 전적으로 관찰자 입장에서 묘사하고 있다. 사실 이런 면면을 하나씩 놓고 본다면 '짜릿하다'는 말을 갖다 붙이는 게 온당한가 싶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일반적인 소설과 비교해본다면 작가가 필력을 통해 독자를 흔들어대는, 일종의 테크닉을 거의 구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책을 읽기로  마음먹은 독자 중 몇몇은 별로 친절하지 않은 작가의 태도에 '빈정이 상해' 책 뒷 커버에 적힌 초반부 줄거리를 채 벗어나기도 전에 다른 무언가에 관심을 돌릴지도 모르겠다. 이 한 권의 책이 주는 인상을 판단컨대, 마이클 코넬리라는 작가는 테크니컬 한 측면에서 '익사이팅'한 스타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작가에게서 태어난 <시인>은 '프랑켄슈타인'이다. 그다지 돋보일 것 없는 요소들을 하나씩 배합시켜 놓으니 어마어마한 존재가 되어 버린, 그래서 어쩌면 작가 자신도 이걸 어떻게  뛰어넘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지 모를 '병기(兵器)'일 거란 생각을 해본다. 지독하게 건조한 문장들은 600페이지에 달하는 중장거리 레이스에서 독자로 하여금 페이스를 늦추지 않게 만드는 순기능을 하고 있다. 한 치의 상념도 허용치 않는 빡빡한 이야기 흐름은 일정한 호흡으로 작가의 의식을  따라붙고 있는 독자들에게 적절한 보상으로 작용한다. 그 와중에도 혹여나 지루함이 느껴질까 싶은 모양인지 작가는 철저히 관찰자 입장에서 씬(Scene)을 그려내면서 독자에게 열심히 상황을 설정하고 캐릭터의 움직임에 앵글을 맞추길 종용한다. 어느 책이나 그렇듯 낯선 분위기와 인물이 풍기는 위화감을 극복하는 초반부 몇 챕터의 인내는 분명 필요하지만 그 지점을 돌아 나서면 코넬리가 만들어 낸 '거인'이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등에 올라타는 순간 이야기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엄청난 속도로 종점을 향해 달린다. 소위 '잘 읽힌다'는 속성을 놓고 기억을 거슬러 가보면 <시인>만큼 나를 채찍질했던 책은 학창 시절 부모님 몰래 밤을 새워 읽었던 김용의 <영웅문> 정도밖에 없을  듯하다. 바로 뒷 페이지 내용이 너무 궁금한 나머지 페이지를 대각선으로 훑다 시피하며 속도를 냈던 무협지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하면, 이 책이 얼마나 강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한 설명이 되리라 믿는다.


그렇게 '겁나게' 열심히 달려 도착한 종착점, 스릴러 소설의 성패가 갈리는 '약속의 한 곳'이다. 천지를 뒤흔들 필력도, 가독성 좋은 서체와 꼭 소장하고 싶은 디자인도, 허접한 결말 앞에선 무력하다. 많은 스릴러 소설들이 이 지점에서 독자의 기대 앞에 무릎을 꿇곤 한다. 뭔가 뒤통수를 딱 때리는 반전이 있거나, 기가 막힌 트릭이 밝혀지거나, 그것도 아니면 독자들의 가십거리가 될 수 있을 정도의 열린 결말이라야 서스펜스물로서의 가치가 있을 텐데, 안타깝게도 이런 류의 소설 팬들은 다른 어떤 장르의 독자보다 냉혹하다. 웬만한 결말로는 김이 새고 만다. 스릴러 팬의 한 사람으로서 나 역시 그렇게 이별을 통보한 작가가 이제는 꽤 많아진 편이다.


'단호박' 같은 독자 이건만 <시인>의 결말은 실로 충격적이다. 아니, 작가에게 '속았다'는 기분이 들었다는 게 더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주인공 잭 매커보이의 에피소드와 글래든의 이야기가 교차로 편집되어 있는 것이 처음에는 매우 불만스러웠다. 누가 봐도 글래든이 범인임이 분명하니 결말에서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가 이미 초반부터 소진된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이전에 읽었던 스티븐 킹의 <미스터 메르세데스>와 비슷한 구조를 택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김이 팍 샌다는 소비자 '컴플레인'을 리뷰에 꼭  적어야겠다고 곱씹으며 결말을 향해 나아갔다. 그것이 <시인>에게 투덜댈 수 있는 단 한 가지였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리뷰에는 그런 불만도 적을 수가 없게 됐다. 글래든은 범인이지만 범인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정도의 정보가 그다지 스포일러성 발언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글래든이 주인공의 이야기와 교차되어 나올 충분한 이유가 소설의 마지막 몇 페이지에 담겨 있다. (아, 코넬리, 이 나쁜 놈)


물론 크라임 스릴러 부문만 놓고 따진다고 해도 마이클 코넬리라는 작가보다 나은 사람이 없겠는가 하면 논쟁의 여지는 분명히 있다. 서문을 써준 스티븐 킹만 해도 그렇다. 그 역시 스릴러 소설계에서 두 번째로 꼽으면 서러울 정도로 수많은 '괴물'들을 빚어낸 작가다. <미스터 메르세데스>가 <시인> 보다 못한 작품이냐는 질문에 누구도 '그렇다'라도 단언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절대적 기준에서 마이클 코넬리가 최고의 작가라는, 그런 무시무시한 판결을 내리는 건 아니다. 더군다나 <시인>이 내가 코넬리에 대해 알게 된 첫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어쩌면 아직 남아 있는 흥분은 특정 조건에 지나치게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알레르기'같은 것일 지도 모른다. 아마도 동네 책방에서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적절하지 않은 주관성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선뜻 접근하기 어렵거나 거부감이 들 수 있는 가능성과 지나친 찬양 일색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기로 했다. 혹시 출판사에서 얼마씩 주고 블로그에 '좋은 게 좋은' 글을 좀 써달라는 제안을 했느냐는 의혹을 제기한다고 하면 사실무근이지만 충분히 개연성 있는 질문이라 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퇴고해봐도 <시인>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러나오지 않는 비판을 억지로 리뷰에 토해낸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이다. 굳이 한 가지 짜내 본다면 두꺼워서 들고 다니기 무겁고 다 읽는 데에 시간이 꽤 걸린다는 정도? (이게 단점이 되나) 추천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 스릴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당연히 접해야 할 '텍스트'일 것이고, 관심이 생긴 독자라면 주저 없이 손에 잡으라고 말하고 싶다.


단점이라기보다는 부작용이 하나 있긴 하다. <시인>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이후에 다른 작가의 세계에 들어가는 게 약간 거북해졌다. 매주 본방 사수하며 대사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보던 주말 드라마가 끝난 느낌과 비슷하다. 그 느낌을 조금 더 가지고 있고 싶고, 다른 드라마가 보던 것보다  재미없으면 어쩌나 싶은 노파심이 드는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코넬리에게 아주 치밀하게 조련당한 모양이다. 억지로 손에 붙지 않는 또 다른 책을 잡진 않을 참이다, 당분간은. 연쇄살인범을 쫓아 전미(全美)를 휘젓고 다니던 지방 신문사 기자를 쫓아다니며 느꼈던 두근거림이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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